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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거지    
글쓴이 : 윤기정    22-11-30 02:51    조회 : 5,865

설거지

 

윤기정

 

 

아내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빈 그릇을 개수대에 던져놓고 늦었다며 부리나케 나갔다. 인근 도시의 문화센터 강의가 있는 날이다. 아내가 나간 뒤 느긋하게 식사를 마쳤다. 뚜껑 닫을 건 닫고, 랩으로 쌀 건 싸서 반찬통을 냉장고에 넣었다. 커피 먼저 마실까 하다가 식탁을 치우기로 했다. 아내가 던져놓고 간 설거짓거리에 내 것을 더 하고 아내의 일 하나는 던다는 마음으로 그릇마다 물을 부어두었다. 커피를 마시고 빈 잔을 들고 개수대로 갔다. 수북한 설거짓거리에 잔 하나 더하고 돌아서려는데 작은 소리가 들렸다.

비스듬히 포갠 그릇 하나가 뒤늦게 물 미끄럼을 타며 낸 소리였나 보다. 무시해도 좋을 소리에 마음 쓰지 말아야 했다. 보이는 설거짓거리를 지나치지 못하고 어설픈 설거지를 하고 말았다. 돌아온 아내가 싱크대 선반에 엎어놓은 그릇들을 보고는웬일이야?라며 묻는다. 얼굴에 첫걸음마 뗀 아기 바라보는 엄마 같은 미소를 감추지 않는다. 온몸이 근지러웠다. 칭찬에 황공한 자세와 표정이 들킬까봐 웃음기 거두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설거지를 시작하지 말아야 했다고 깨달았을 때는 늦었다. 벌써 가슴 속에 한 마리 고래가 춤추고 있었다.

설거지를 못 한 날이면 돌아온 아내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내가 늦은 설거지를 할 때는 그릇 부딪는 소리도 크게 들리는 듯했다. ()에서 남자 노인들을 상대로 운영한 요리 교실에서 조리부터 설거지까지 해보지 않았던가? 설거지하는 날이 늘어갔다. 아내가 일찍 나가는 날에는 으레 내 일이려니 할 만큼 되었다. 그래봤자 아침 점심 설거지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설거지가 재미있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팔뚝까지 옷소매를 걷어붙인다. 그릇에 남은 찌꺼기를 거름망에 쏟는다. 기름이나 양념이 덜 묻은 수저와 수저 받침대, 밥공기를 먼저 닦는다. 이어서 찌개 국물 묻거나 기름 묻은 그릇은 행주에 세제를 묻혀서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닦는다. 맑은 물로 가시고 헹군다. 컵까지 닦아서 건조대에 엎어놓고 개수대를 훔치고 마른행주로 물기를 거둔다. 행주를 헹구어 꼭 짜서 수도꼭지에 건다. 휘파람이 나온다. 손주 낯 씻기고 맑은 얼굴 볼 때의 마음이다. 창으로 흘러든 햇살에 그릇마다 빛나는 점 하나씩 앉았다.

설거지할 때면 가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밥공기나 국그릇을 깨끗하게 비우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그릇을 깨끗이 비워야 부자 된다는 외할머니의 밥상머리 교육이 평생의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거지할 때 공기에 붙은 뭉개진 밥알이나 자잘한 국건더기가 그릇에 남은 것을 보게 된다. 선택받지 못하여 한순간에 찌꺼기라 불리는, 음식이었던 존재들이다. 이 찌꺼기에서 삶에 대한 생각이 싹텄다. 씻겨나간 찌꺼기는 수중 생물의 먹이가 되거나 깊은 물 밑의 펄에 잠겨 긴 잠을 자며 섭취한 음식과는 다른 순환으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설거지는 그릇은 그릇대로 찌꺼기는 찌꺼기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리는 일은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나아간다. 지금 선반에서 몸을 말리는 빛나는 식기들도 언젠가는 쓰임새를 다하고 본래의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개수대 앞에 손 적시고 선, 나도 마찬가지라 생각하면 커다란 순환의 고리가 연상되어 작아지고 겸손해진다.

그 생각은 하고 또 해도 지루하지 않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우리네 인생이 음식과 음식 찌꺼기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딱하기보다는 재미있다. 재미있는 상상이 설거지하는 즐거움이 된 것 같다. 음식이 되기 위해 다져지고, 잘리고, 볶이고, 지져지고, 끓여지고 나면 배추 줄거리나 철갑상어알이나, 와인이나 막걸리나 개수대 아니면 화장실에서 한 가지로 처리된다. 물론 우리 몸 안에서 변하는 것들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처음에는 칭찬이 좋았지만, 지금은 춤추는 고래가 되고 싶어서 설거지하지 않는다. 끝이 곧 새로운 시작이라는 약간의 철학적 이유도 아니다. 밥알, 고춧가루, 기름 뜬 물에 몸을 담근 채 헝클어진 그릇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다. 꼭 이유가 없으면 어쩌랴. 설거지하는 시간이 즐겁고 마음도 편안해지고 삶의 작은 지혜까지 얻는다면 좋은 일 아닌가.

앞마당에는 덜 깬 졸음처럼 석양이 머뭇거리고 아내는 저녁을 준비한다. 건조대에서 몸 말리며 쉬던 그릇들이 형광등 불빛에 기지개를 켠다. 식기는 우리 삶을 위해 차려질 것들의 온기와 향기와 이야기까지 담으려 안팎을 가시고 부시고 비웠다. 그릇들은 조용히 엎디어 기다린다. 설거지는 마음마저 비우는 일이자 시간이다. 가끔 아들네서 식사하고 나면 개수대에 바짝 다가선 아들의 넓은 등짝을 보고는 못난 놈!소리를 삼켰는데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아들 며느리 손주들 앞에서 팔뚝 한 번 걷어붙여 볼까나?

 2022. 12 <양평문학 제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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