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자연을 담다
해마다 겨울은 추워지고 이불 밖은 위험해진다. 가족여행으로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좋았기 때문일까. 창밖으로 눈이 소복이 쌓이는 만큼 하와이에 대한 그리움도 쌓인다. 사정이 여의찮아 마음속에만 담아두기를 여러 해, 어머니와 하와이를 찾았다. 어머니가 그곳 사는 친구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동안 바닷가로 나갔다.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이라도 들 듯 몸이 노곤하게 풀려온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누워 눈을 감고 있노라니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고, 그 사이로 아이들과 아이가 되어버린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노래처럼 다가온다. 지금이 겨울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평화로움에 몸을 맡기게 된다. 산들바람마저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귓전에 아른거리는 소리. 전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일출은 어디가 좋고 어디를 가면 뭐를 볼 수 있다며, 온갖 관광명소를 늘어놓던 어머니 친구의 목소리. 호객행위 같아 귓등으로 흘려보냈건만…. 허구한 날 맛난 거 사 먹으며 바닷가에서 햇볕이나 쬐면서 빈둥대다 보니 자연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귀국을 하루 앞두고 어머니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다이아몬드 헤드. 와이키키 동쪽에 인접해 있는 화산이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몸체가 날아간 탓에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높고, 산이라기엔 모양새가 묘하다. 분화구가 ‘아히’라는 물고기의 머리처럼 생겨서 현지인들은 레아히(Le’ahi)라고도 부른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지형이 해안방어에 이상적이라 1900년대 초 미국 정부가 군사 목적으로 매입하였다.
한때 마른 숲으로 덮여 있었다더니 과연 초입에는 빛바랜 이파리만 가득하다. 바위 경사면의 토양이 얕아 나무는 없이 풀만 무성한데, 갈대밭처럼 노랗고 버석거린다. 완만한 시멘트길이 끝나면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지그재그로 닦은 이 길을 따라 한 세기 전의 인부는 노새와 함께 산을 올랐을 것이다. 왜 좀 더 편한 신발을 신지 않았는지…. 바위를 타고 빙빙 돌며 오를 때는 애꿎은 신발 탓을 해본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끝에만 집중하다 보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바윗길이 시작되기 전에 쉬엄쉬엄 갈 테니 먼저 가라고 했던 것을 떠올린다.
바위산 중턱에는 전망대가 툭 튀어나와 있다. 비로소 사방을 둘러보는 순간,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명작을 눈에 담게 된다. 멀리 보이는 들판은 마치 태초의 모습 그대로 시간을 넘은 것 같다. 드문드문 보이는 건물들만이 사람 사는 곳임을 알린다. 이 정도 관광객이 찾는 곳이니 계단 길을 만들었을 법한데도 그러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리라. 땅만 보고 걷지 말고 풍경을 눈에 담으라고.
중간 지점을 지나 일흔일곱 개의 계단을 가볍게 오르고 나면 좁은 문 너머로 긴 터널이 이어진다. 터널 안쪽은 작은 창이 있기는 하지만 빛이 충분치 않아 매우 어두운데, 띄엄띄엄 설치된 조명이 없었다면 마주 오는 하산객과 부딪칠 정도이다. 조명이 달린 벽면에는 바위가 반짝인다. 이곳을 처음 발견한 서방의 모험가들로 하여금 다이아몬드 산으로 착각하게 한 방해석이다. 해저 분출로 인해 분해된 마그마 입자가 공기 중에 날아가 응회암에 붙어 응회구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안내 책자며 인터넷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이지만, 18세기 말 항해 중이던 제임스 쿡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정상을 발견하고는 이름까지 다이아몬드 헤드라고 지었다.
어둡고 좁은 터널을 지나니 나를 맞이하는 건 계단. 아흔아홉 단뿐이지만 가파른 탓에 선뜻 첫 단에 발을 얹을 수 없다. 양손으로 좌우 벽면을 짚어가며 다 오르고 나면 벙커 안에서 나선형 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벙커에서 나와 보이는 것은 산호초가 비치는 초록빛 바다와 그 너머로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깊고 푸른 바다, 그리고 닿을 듯 닿을 리 없는 하늘. 오른쪽으로는 와이키키와 호놀룰루 시내 전경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동부 해안이 이어진다. 처음 등산로에 오를 때의 잡념은 말끔히 사라지고, 나란 존재는 그 광활한 풍경 앞에 한없이 작아지고 만다. 왼쪽의 한가한 농촌 풍경과 오른쪽의 복잡한 도심의 풍경은 바다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엿보는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멀지 않은 과거에 이곳을 지키던 해병은 저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잠시 쉴 때는 벙커 꼭대기에 올라앉아 고향에 있을 가족을 그리워했겠지. 어쩌면 아이와 함께 이곳에 올라 무등 태워주며 바다를 항해하는 모험가 이야기를 들려줬을지도. 옛날 옛적 아직 서구의 문명이 닿지 않았을 때, 이곳에 올랐던 원주민이 바다를 살피다가 저 멀리에서부터 다가오는 배를 발견하고 매우 놀랐단다. 신의 사자가 오는 거라고 여겼을 거야. 배 위에서는 다이아몬드 산을 발견했다고 환호하고 있었지. 원주민은 한달음에 내려가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고, 마을 사람들은 바닷가로 뛰어가서 경외의 마음으로 기다렸지. 배에서 내리는 백인들을 보고 신들의 강림이라고 놀라워했어, 뱃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다이아몬드만이 가득했을 텐데 말이야. 옛날이야기의 끝은….
그 영국인 탐험가들은 원주민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충돌을 빚었고 끝내 선장을 이곳에서 잃고 말았다. 서구 문명이 닿기 전, 옛날에는 이 자리에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카누들을 안내하기 위해 봉화를 피우고 신전에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바람의 신에게 기원했다고. 전쟁 중에도 총격이 일어난 적이 없었듯이 부디 앞으로도 이대로 보존되기를 기원했다.
누군가의 감탄 소리에 감상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어머니가 곁에 와있었다. 오를 때는 각자의 상념에 빠져 홀로 걸어왔으나 내려갈 때는 서로 눈에 담았던 것을 나누었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어머니의 손에는 어머니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담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잡은 손을 한 번 흔들어보았다. “낙원이로구나!” 파인애플주스를 사마시며 던진 탄성에 어머니가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이제 눈을 맞으러 가볼까?
모던포엠, 20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