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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난 샐리    
글쓴이 : 윤기정    24-01-18 06:53    조회 : 1,216

내가 만난 샐리

 

윤기정

 

 

과천 가는 전철 안에서 아내의 문자를 받았다. 고등학교 후배 내외와 함께 운동하기로 했으니 일찍 오라는 당부였다. 오가는 데 3시간 넘어 걸리고, 점심 먹는 시간 더하면 오후 4시까지 귀가가 쉽지 않았다. 오늘은 소래 포구에 가기로 했으니 어림도 없었다. ‘노력하겠지만 셋이 라운딩 할 생각하라고 답했다. 파크골프는 골프와는 달리 세 명 라운딩도 페널티가 없다.

이촌역에서 경의·중앙선 열차로 갈아탔다. 오후 4시 전에 양평 오빈역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경로석에 빈자리가 없었다. 한 정거장 지났을 때 앞에 앉았던 장년의 남자가 어르신 앉으시죠.” 하며 일어섰다. 모자 밖으로 삐져나온 흰 머리카락을 보고 앉아있기가 민망했던 모양이다. ‘고맙다며 얼른 앉기에는 그의 나이가 적어 보이지 않아서 선뜻 양보 받기가 미안했다. 그도 경로석에 앉을만한 나이로 보였다. 그가 말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서서 옆으로 가버리니 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엉뚱한 아주머니들이 냉큼 앉는 꼴을 여러 번 당했지 않은가. 미안한 마음으로 남자 쪽을 몇 번 쳐다보다가 깜박 졸았나 보다. 눈을 떠보니 열차는 옥수역을 출발하고 있었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햇빛에 반짝이는 그의 벗어진 머리가 걸어가고 있었다.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고 습관처럼 떠오르는 대로 하루 일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30여 분 전, 남태령역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개찰구가 보였다. 화장실 표지판이 반가웠다. 안도하는 그때 통로 한가운데 입간판이 앞뒤로 다리를 벌리고 앞을 막아섰다. ‘화장실 폐쇄’. 다른 문구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폐쇄두 글자만 보였다. 찬 음식을 먹으면 속이 바로 반응하는 체질이다. 생선회가 특히 그랬다, 소래에서 점심으로 먹은 회가 말썽이었다. 친구의 결정에 따라줘야 할 형편이어서 점심 먹고 급하게 일어섰다. 친구는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인 데다, 몸이 불편해진 뒤로는 더 힘들어했다. 뱃속을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 친구 아들이 남태령역에서 전철을 타면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시간 절약보다 당장 뱃속을 진정시켜야 했다. 승용차 타고 오면서 내내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폐쇄라니.

다음 역은 사당, 목적지 이촌역은 그곳에서 세 정거장 더 가야 한다. 열차를 탔다. 숨 조절하며 뱃속한테 물었다. ‘이촌역까지 참을 수 있겠니?’ 대답도 듣기 전에 동영상처럼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머니와 함께 걸어가는 딸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스커트 아래로 무언가 떨어졌다. 걸으면서 볼일을 본 것이었다. 고등학교가 중앙선 열차 종착역 근처에 있어서, 갓 상경한 차림새의 사람들을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60년대 후반, 집 나서면 화장실을 찾기 어려웠던 때에 본 일이었다. 그 딱한 장면이 하필 그때 떠올랐는지 기억의 어느 깊은 구석에 숨었다가 오늘 심상치 않은 장면에서 떠오르다니 고얀 일이었다.

고약한 상념에서 벗어났을 때 열차는 동작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이촌역이다. 거기서 해우(解憂)하면 만사 오케이다. 생각만으로도 뱃속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촌역 화장실. 심산 도량道場이 아니어도 해우소(解憂所)의 의미를 깨칠 수 있다니 부처의 은혜가 가없다. 발걸음도 가볍게 양평행 열차에 올랐고, 자리까지 얻어 앉았다.

친구는 고등학교 동기다. 요즘 말로 찐친’, 진짜 친구다. 친구가 며칠 동안의 폭음으로 병원에 실려 갔던 일을 한 달이 지나서야 알았다. 지난해까지 치아 치료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만나다가, 치료도 끝나고 친구도 병원을 옮기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던 사이에 생긴 일이었다. 알코올성 치매라는 말이 걸리기는 하지만 인지능력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신체 기능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새벽마다 달리기 하던 친구가 지팡이 없이 걷기 어렵고, 이가 없어서 의치에 의존하는데 제대로 씹지 못했다. 치과 의사이자 치대 교수였는데 제 구강 관리는 제대로 못 했으니,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친구는 수년 전 외동딸을 잃었다. 손녀 둘 남기고 떠난 죽음 앞에서 얼마나 아팠을까? 소주 한 잔이 주량인 친구가 그날 밤새워 마시다, 웃다, 자다가를 반복했다. 그 딸이 나에게는 제자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친구는 지난해에 큰 병에서 아내를 겨우 구했다. 친구의 아내는 서해 어느 섬에 있는 요양원에서 가료 중이다. 내내 함께 살던 두 손녀와 사위는 새 가정을 꾸려서 떠났다. 말수 적은 친구가 혼자 아파하며 견뎌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가족도 친구도 대신하지 못하고, 덜어줄 수도 없는 일이 있다는 걸 가장끼리는 안다.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여러 날 생각했다. 진짜 친구라면서 한 달이나 몰랐다는 사실에 속상했다. 가까이 사는 아들이 휴직하고 아버지를 돌보고 있지만 친구 사이에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따로 있는 법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친구를 만나자고 결심했다. 그래봤자 몇 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던 중 하루라도 많은 시간을 같이 하려고 소래 포구에 가기로 했다. 다른 일은 젖혀두고 그날만은 친구와 오래 있고 싶었다.

그날 여러 일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해우의 깊은 맛도 즐기고, 두 시간 거리의 여행을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길 수도 있었다. 이른 기상으로 피곤했던 친구 아들 덕에 예정보다 빨리 자리를 파했고, 그 바람에 아내의 소원대로 함께 운동도 했다. 살면서 계획대로 되는 일이 몇이나 될까마는, 아직은 걸린 데가 더러 있으니 잘 나눠서 살 일이다. 일마다 꼬이기만 한다는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샐리의 법칙(Sally's law)이 있단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일어나는 상황으로, 라이너(Rob Reiner) 감독의 미국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에서 계속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다가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이끌어 가는 여주인공 샐리의 모습에서 빌려온 말이란다. 유월 초이튿날, 소소한 일들이 잘 풀린 걸 보니 샐리가 나의 특별한 날을 위해 먼 한국까지 다녀간 모양이다.  

2023. 10 '양평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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