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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노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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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불    
글쓴이 : 노정애    24-07-03 09:18    조회 : 2,011
                                    이 불

                                                                                     노정애

 

 부산 동구 좌천동의 문화아파트는 산복도로 위에 있었다. 비어있으니 언제든 쓰라는 지인의 말에 며칠 머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산 정상에 가까운 이 아파트는 62년생이다. 새로 도색을 했는지 외관은 쨍한 흰색에 관리를 잘해서 4층 숙소로 가는 계단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안방 창가에서 멀리 부산항과 부산항 대교가 보였다. 밤이면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촘촘히 지어진 집들과 큰 빌딩, 고층아파트, 시시각각 색깔이 변하는 부산항 대교의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었다.

  근래에 잠들기가 어렵다. 친구들이 갱년기증상이라며 약을 처방 받으란다. 숙면에 도움이 되는 각종 차와 좋은 베개를 추천한다. 시간이 약이란다. 나는 두꺼운 책을 읽는다. 덕분에 지루하게 느껴졌던 책들을 읽을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 수면 시간이 짧아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몇 시간은 잔다. 숙면은 포기한 지 오래다.

 장거리 여행으로 몸은 피곤했지만 바뀐 잠자리 탓에 더 잠들기가 어려웠다. 책도 안 읽혔다. 빈집이라 온기도 없고 밤 기온까지 뚝 떨어져 조금 추웠다. 손님용 이불은 모두 여름용이라 얇은 이불로 어깨를 감싸고 창문을 열었다. 불빛이 꺼져가는 집들을 한 집 두 집 세었다. 그리고 조각 잠을 잤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5월의 날씨는 맑고 햇살은 눈부셨다. 간간이 바람이 불었다. 담도 없는 높고 낮은 집들이 산의 능선을 따라 아래로 펼쳐져있었다. 주택의 옥상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안 쓰는 물건이나 잡동사니를 쌓아둔 곳은 없었다. 옥상 정비 사업이라도 했는지 반질반질 윤이 났다.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지붕도 보이고 나무나 꽃, 푸성귀를 잘 가꾼 집, 너른 평상이나 탁자, 몇 개의 의자를 둔 곳도 있었다.  

 휴일이라서인지 빨래를 널어둔 집이 유난히 많았다. 긴 줄에 걸린 옷들은 춤추듯 움직였다. 이불들은 조금 느리게 바람의 손짓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파트 생활은 편리하지만 건조기가 없는 내게 실내에서의 빨래 말리기는 늘 아쉽다. 너른 마당이나 옥상에 빨랫줄을 이어 척 걸쳐만 두면 햇살이 바람이 알아서 말려줄 텐데…. 가슬 가슬 마른 옷들과 이불에서는 바람과 햇볕의 냄새가 배어있을 것만 같았다. 수시로 창가에 섰다. 반짝이는 야경보다 생동감 넘치는 낮 풍경이 더 좋았다. 야채를 넓게 펼쳐 말리고, 빨래를 널거나 걷고, 나무에 물을 주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가족이나 이웃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가끔 개가 올라와 짖기도 했다. 결혼 전까지 살았던 광안리의 집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버지는 시멘트 블록공장을 오랫동안 했다. 축구장 반 정도의 공장 모서리에 살림집이 있었다. 작은 화단에는 감, 대추, 무화과가 열매를 맺고 천리향이나 작약 꽃이 피었다. 초여름이며 창살을 타고 올라간 넝쿨장미가 붉게 꽃을 피웠다. 개도 키웠다. 수돗가 옆에는 긴 빨랫줄이 있었다. 여섯 식구의 빨랫감은 늘 넘쳐났다. 엄마가 빨고 틈틈이 나도 도왔다. 날이 좋으면 이불빨래를 했다. 여름 이불은 빨리 말랐다. 가을이면 풀을 먹여 다듬이 방망이로 두드리거나 발로 밟아서 주름을 편 홑청을 말렸다. 엄마가 물 한 모금을 푸우~’ 하고 홑청에 뿌릴 때면 작은 무지개 떴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지개들이 홑청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따라쟁이 내가 하다가 사례라도 걸리면 등을 두드려주며 웃었다. 엄마는 빳빳하게 마른 홑청으로 한 땀 한 땀 이불을 꿰맸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도 거들었지만 엄마의 고른 바느질 솜씨를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얇은 이불도 풀을 먹인 이불에서도 바닷바람과 햇살 냄새가 났다. 가족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 어머니의 수고가 있어 가능했다. 잘 마른 잠옷을 입고 바삭 바삭 소리가 나는 이불을 덮으면 잠도 솔솔 잘 왔다. 무지개와 엄마의 웃음이 담긴 이불에 얼굴을 묻으면 냄새까지 좋아서 행복감에 아찔해지곤 했다.

 잠 못 드는 밤이면 그 이불들이 생각났다. ‘옥상에 널린 저 이불만 있다면….’ 그럼 아찔한 행복감에 취해 잘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그 이불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엄마가 보고 싶었나보다.

 


                                                                              에세이스트 2023년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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