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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송이 프리지아꽃    
글쓴이 : 유영석    25-03-15 12:30    조회 : 184

한 송이 프리지아꽃

유영석


 지난 가을 누이동생이 췌장암으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부모님 품 아래 3남매 중 먼저 이승과 이별을 고했다. 누이동생은 공부를 잘하고 노래 솜씨도 뛰어났다. 착한 마음씨에 따뜻한 미소는 집안을 비추는 고운 햇살이었다. 환한 웃음 덕에 쌀독이 비어도 우리 가족은 늘 화목했다. 그 빛나던 햇살이 어두운 밤에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슬픈 소식은 노크도 없이 치고 들어온다. 봄 내음이 피어오르는 20234, 누이동생에게 갑작스러운 병마가 닥쳤다. 담낭이 막혀 시작된 검사는 췌장암이라는 치명적인 진단을 내놨다. 6개월간 약물치료 후 수술을 받았지만 끈질기게 혈관에 붙어 있는 암세포를 모두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술 후 30여 차례 항암치료를 받으며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수술 뒤 10개월쯤 극심한 통증으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입원 후 보름이 지난 즈음 조카로부터 새벽에 문자가 왔다. 어머니 호흡이 약해져 응급 처치실로 옮겼다는 내용이었다. 남동생과 함께 놀란 가슴으로 광명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순간순간 가족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병실에 들어서자, 놀란 가슴이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누이동생은 멍한 눈으로 입을 벌린 채 숨을 헐떡였다. 듬성듬성한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 그리고 앙상한 팔에는 모르핀 주사가 꽂혀 있고 코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패치, 해열제, 영양제는 거미줄처럼 몸을 휘감고 의료기기들은 말없이 불빛만 깜빡거렸다. 그 순간만은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로 울려 퍼지는 찬송가도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영미야, 오빠다!”

몇 번을 애타게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다. 잡은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온다. 삶의 한 가닥 끈을 놓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리라. 먼저 떠나서 미안하다는, 오빠에게 남기는 고별인사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생명이 꺼져가는 걸 지켜보는 가족들의 가슴을 마르지 않는 슬픔이 적신다.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겨진 후 조카로부터 누이동생이 십자가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곧바로 목사님을 모시고 병상 예배를 드리니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표정이 사라지고 평온이 내려앉았다. 이승과 저승의 길목에서 방황하던 영혼이 마침내 안식을 찾은 듯했다.

그날은 유달리 잠자리를 뒤척이다 새벽 3시에 깼는데 휴대폰 벨이 울렸다. 새벽에 울리는 벨 중 열의 아홉은 불길을 알리는 신호다. “큰외삼촌, 어머니 혈압이 30으로 떨어졌어요.” 조카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청각은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누이동생 귀에 전화기를 대도록 하고 영미야, 사랑해!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1년 반을 암과 싸우다 떠나는 누이동생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였다.

누이동생은 인문계 고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 상 일찍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42년이라는 긴 세월을 은행에 다니다 정년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병마가 찾아왔다. 병상에 누운 누이동생을 보니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뇌출혈로 고생하셨던 어머니와 암 투병 중인 누이동생의 얼굴은 서로 닮은 고통의 형상이었다.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후회가 늘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누이동생마저 떠나보내야 하니 가슴이 온통 안으로 멍이 들었다.

노래를 좋아했던 누이동생은 입원하기 며칠 전 생일날 두 딸에게서 전자피아노를 선물 받았다. 소녀처럼 기뻐하며 건반을 두드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암이라는 그림자가 삶을 덮치자 피아노는 주인을 잃고 소리도 잃었다. 정년을 앞두고 두 딸과 함께 꿈꿨던 유럽 여행은 펼쳐지지 못한 지도처럼 서랍 속에 묻혔다. 설레는 날을 향해 나아가던 꿈은 미완성의 악보처럼 중간에서 갑자기 멈췄다.

누이동생의 삶은 고단했다. 집안의 맏며느리로, 두 딸의 어머니로, 평생 직장인으로서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무거웠다. 하지만 삶을 짓누르는 무게에 더해 암과의 기나긴 싸움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긍정을 놓지 않았다. 병상에서도 종이접기로 꽃을 만들어 간호사와 다른 환자들에게 나누어주는 날개 없는 천사였다. 어쩌면 하나님이 지상의 천사를 곁에 두고 싶어 남보다 일찍 하늘나라로 데려갔는지도 모른다.

누이동생은 프리지아꽃을 좋아했다. 아니, 그녀가 곧 한 송이 프리지아꽃이었다. 프리지아의 꽃말은 순수, 사랑이다. 분홍 햇살을 머금은 듯한 얼굴은 언제나 주변을 밝게 비추고 고난이 닥쳐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부드러운 꽃잎처럼 마음은 따뜻하고 가족과 이웃에 사랑을 선사했다. 그녀의 미소는 어린 시절 내 가슴 속 어둑한 방을 환히 밝혀주었다. 누이동생은 곱고 향긋한 한 송이 프리지아꽃이었다.

누이동생의 투병 일기를 써 내려가니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눈이 얼마나 어두운지, 사랑하는 이의 기다림이 얼마나 짧은지···. 누이동생은 사랑의 의미와 삶의 지혜를 남겨주었다. 가족과 이웃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하루하루의 삶을 후회 없이 가치 있게 살라고 일러주었다. 가스펠 송 <내일 일은 난 몰라요>는 누이동생의 삶을 노래하는 듯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 해요.

상큼한 봄바람이 살포시 나뭇가지에 내려앉는다. 발걸음이 누이동생이 입원했던 호스피스 병동으로 향한다. 창가에 놓인 프리지아꽃 향기가 누이동생의 미소처럼 포근히 나를 감싸안는다. 사랑의 노래가 바람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오는 듯하다. 분홍빛 향기에 젖은 누이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게 되뇐다.

“Carpe diem(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어느 땐들 그렇지 않으랴만 이른 봄이 되니 따뜻하게 웃고 있는 누이동생이 더더욱 보고 싶다.

  


문학에스프리_202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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