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문학회 >  회원작품 >> 

* 작가명 : 봉혜선
* 작가소개/경력


* 이메일 : ajbongs60318@hanmail.net
* 홈페이지 :
  7시에서 9시 사이    
글쓴이 : 봉혜선    25-11-24 11:25    조회 : 454

7시에서 9시 사이

 

 잠이 깼다. 714이다. 일어나기 좋은 시간이다. 체조는 나가서 하기로 한다. 서둘러 일어나 라디오를 켠다. 고정해 놓은 주파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조금 늦은 마음이 편안하다. 어느 때부터인지 7시부터 두 시간 계속되는 음악프로그램이 나를 일어나게도, 거실로 나오게도 하는 원동력이 되어 있다.

 밤새 내린 눈처럼 일은 밤새 나를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손짓한다. 익숙해진 일은 굳이 전깃불을 켜지 않아도 음악 따라 절로 되어간다. 아침 일을 살피는 발걸음에 리듬이 실린다. 734분에 해가 뜬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해돋이 시각을 알리는 DJ 목소리가 여러 지역으로 이어지는 걸 들으니 여기 서울은 아닌가 보다. 겨울 해는 나처럼 늦잠꾸러기다. 다행이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실내에서 내다보니 해가 솟으려는 기운이 있다. 날이 밝는 대로 따르는 일상이 좋다. 나이 들어가니 몸이 자연의 일부분임을 깨닫는다. 베란다로 나간다.

 어제 대파 한 단을 사다 스티로폼 상자에 심었다. 아파트 베란다 흙 속 대파는 여름보다 겨울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대파는 겨울 음식인 곰탕이나 갈비탕, 혹은 무국에 빠져서는 안 되니 겨울에 더 잘 어울리는 양념이다. 겨울이라고 움츠리고 있을 일이 아니다. 겨울 아침이어도 생명이 할 일은 있다. 생명력이 돋아나는 시간이 아닌가.

 창밖 외다리로 서있는 정수리가 보이는 나무를 내려다본다. 외다리 나무는 장식물로서의 잎을 떨구고 비로소 가벼운 몸으로 겨울을 날 준비를 마치고 있다. 나목으로 겨울을 나는 저 숱한 독각의 존재들의 숭고함을 무시할 자 누구인가. 다리가 많을수록 하등한 존재가 아니냐는 이론을 펼친 작가가 나무를 가장 고등한 존재로 해석한 이론에 동감하는 순간이다.

 창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다시 베란다로 들인다.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계절을 모르게 된 온실 속 화초에 일일이 인사하고 물을 부어준다. 내가 기르는 식물에 대한 예의는 물주는 일에 분갈이, 복토, 영양제 꽂아주기, 먹고 버리는 커피 찌꺼기, 계란껍데기 부수어 얹어주기 같은 극히 자의적인 일뿐이다. 사철 푸른 화초들은 그런 주인이 미운지 일제히 밖을 향해 몸을 기울인 형상이다. 나를 보라고, 내 생활도 봐주라고 안을 향해 돌려 앉히지만 이내 잎부터 슬그머니 다시 나를 외면하고 말아 매일 아침 안색을 살펴보아야 한다.

 환기하려고 열어두고 나온 문으로 음악이 흘러나온다. 화초들에게 나의 음악을, 나의 하루의 시작을 함께 하자고 말한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런 아침이야말로 소시민이 누릴 수 있는 확실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거지도 청소기 돌리기도 아침 일이지만 음악 듣기에 방해되니 제외다.

 새벽 출근하는 남편은 이미 나간 지 오래다. 남편은 차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출근 후 카카오 톡으로 몇 군데 안부를 전한다. 나도 속해있는 단체 톡방의 울림으로 무사히 도착했음을 잠결에 듣기도 한다. 항해사인 아들과 실시간으로 나누는 안부 인사에 안심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하는 평온함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막내 출근 시간은 9시다. 잠 많은 본인에게 맞춤으로 구한 집 근처 직장의 출근 시간에 대견해했다. 출근이 늦어 밤 11시에도 친구를 만나러 가니 이 시간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나만의 시간이다.

 퇴직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늦게까지 자거나 허겁지겁하는 아침에서 벗어나 늑장부리기라고 들었다. 얼마 전에 주부라는 직업에서 벗어난 나도 생활 주기를 바꾸었다. 그동안 첫 번째 출근은 남편, 두 번째는 큰아들, 맨 나중으로 7살 터울 있는 막내를 챙겨 보내느라 밥 세 번 차리기 등 각자에게 집중했다. 5시 전에 시작한 아침은 9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큰아들이 중학생일 때 어쩜 하루도 빠짐없이 교복을 다려 입혀 보내느냐는 말을 하러 일부러 나를 찾은 선생님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청춘의 시절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무엇인가라는 막연한 문제를 누구나 고민한다. 생활에 밀려 밀쳐두었던 그 문제를 다시 꺼내는 시기가 되었다. 나를 찾아야 한다는 숙제를 의식하면서 숙제의 막연함과 무거움에 짓눌렸다. 가장 가까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파랑새를 찾으러 멀리 떠난 여행에서 돌아온 치르치르와 미치르처럼, 사윗감을 찾으러 벽에게도 바람에게도 햇님에게도 다녀온 이솝우화의 생쥐부부처럼 답은 가까이에 있을 것이므로. 그걸 경험으로도 책으로도 배웠으므로.

 한가한 아침을 맞을 수 있게 되자 라디오를 벗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성악을 했던 엄마가 늘 가까이 했으므로 나에게도 가까운 음악이 라디오만 틀면 정답게 다가왔다. 음악은 내게 무엇보다 가깝고 다정한 책 같으나 소리를 가졌다는 특징으로 눈이 안 좋은 지금의 나에게 더욱 친근한 존재다. 전깃불을 켜지 않아도 되는 박명 아래서 익숙한 음악으로 하루를 여니 앞으로도 오랫동안 벗 삼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가수 안치환의 맑게 절규하는 노래가 너무 좋아 휴대용 카세트에 연결한 이어폰을 끼고 다니느라 친정에 가서 엄마를 만나도 빼지 않아 혼난 시기를 거쳐 왔다. 내 귀에만 들려주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속삭임 때문에 앞에 선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잊을 정도였다.

 얼마 전 여행길에 지인이 들고 온 휴대용 스피커가 좋아 보여 바로 같은 것으로 장만했다. 혼자 있는 이 시간에 울려 퍼지는 음악과 동그랗고 빨간 그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의 공통점은 음악, 바로 그것이다. 음악이 나를 찾기 위한 방법과 시작의 동행이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팝송 가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리듬에 빠질 수 있어 오히려 좋다. 학교 다닐 때 밤새워 듣던 라디오 음악 프로를 듣지 못했던 시절은 그래서 행복하지 않았던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다시 나로 향하며 찾은 음악이다.

 찻물이 끓었다. 아침마다 하는 시 필사 준비도 했고 향에 이끌려 피워둔 향냄새도 나를 감싼다. 날이 밝아져 기분도 따라 가벼워지고 있다. 자연에 따르는 몸이 자유스럽다. 음악과 빛이 수놓는 두 시간이면 하루 일과가 끝난 것도 같고 비로소 시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상쾌하고 경쾌한 기분의 색은 떠오르는 태양빛과도 같아서 몸과 마음 어디 한 군데 빠짐없이 골고루 스며들며 맑히고 밝힌다. 운동 갈 채비도 해두었다.

 내 삶을 내가 꾸려간다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지적당하지 않고 나를 꾸려가는 맛이란. 무엇을 위하고 향하느라 그리도 애달파하고 바라고 뛰고 그리워하며 치열하고 맹렬하게 덤볐던고.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적다는 것을 알지만 기대가 없다고 설렘마저 외면하지는 않으려 한다.

 마음의 싹이, 몸의 싹이 새로 돋는 것만 같다. 라디오 볼륨을 키운다. 음악에 맞춰 몸과 마음을 쭉쭉 편다. 내가 살 날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 또 새 날이다. 오늘도 잘 살 수 있다. 오늘 잘 살면 날마다 새 날이다.


<<제 7회 한국산문 이사회 수필 79선> 


 
   

봉혜선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65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 글쓰기 버튼이 보이지 않을 때(회원등급 … 사이버문학부 11-26 103703
공지 ★(공지) 발표된 작품만 올리세요. 사이버문학부 08-01 105764
5 길 위에서 봉혜선 10-29 10683
4 낡은 책 봉혜선 10-02 7895
3 전화위봄<轉禍爲春> 봉혜선 07-13 6671
2 봄밤의 외출 봉혜선 03-30 4497
1 투명함을 그리다 봉혜선 03-03 4527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