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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노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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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만 참으시지    
글쓴이 : 노재선    12-09-24 15:11    조회 : 4,031
조금만 참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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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재 선
 
아버지의 출생은 화려했다. 조모님이 딸 셋을 낳은 뒤에 백일 기도로 점지를 받아 호랑이가 옆구리를 치받는 꿈으로 산기를 예감한 후, 우리 집 거실에 우아한 자태로 대를 넘긴 백동(白銅)장식 나비무늬 고가구 모서리를 잡고, 경남 충무시 통영이라고 하는 어촌에서 산파도 없이 혼자 아버지를 낳으셨다. 그 날이 1921년 4월 열 이렛날이다.
할머니는 첫 딸만 남기고 삼 남매 모두 일본 유학을 시키신 사려가 깊으신 분이셨다. 독자(獨子)인 아버지는 유복하게 자랐고, 신문화에 물들었으며, 수려한 외모에 유머스런 말솜씨와 기막힌 노래솜씨, 거기다 사교성까지 있어 주위에 늘 친구들이 많았다.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항구도시 통영은 많은 예술가들을 배출시킨 아름다운 곳이다. 그 곳에서 감성을 키우며 자란 아버지는 유학 후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 아들을 위해 할머니께서는 노여워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바다를 지키는 용왕님께 새벽기도를 다니시곤 했다. 철없던 나도 가끔씩 새벽이슬을 맞으며, 광주리에 정성껏 담은 나물, 강정 등을 머리에 이고 가는 큰고모 치맛자락을 잡은 채 앞서 호롱불을 들고 가는 할머니를 놓칠 새라 종종거리며 따랐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출렁거리는 바닷가 바윗돌에 서서 자식 출세를 위해 동서남북 방향을 바꾸어 가며 두 손 모아 열심히 동해바다 용왕님네, 아들 출세하게 해주시고 라며 해가 오를 때까지 빌고는 하셨다. 그렇게 지성으로 기도한 덕분인지 아들은 서울에서 승승장구하였다.
용왕님의 덕을 입은 아버지는 역설적이게도 교회 전도 부인의 중매로 팔 남매의 여섯째로 태어난 서울 토박이 엄마를 만났다. 정신대에 끌려간다는 이유로 딸 있는 집에서는 서둘러 결혼을 시키던 시대에 보육과를 다니면서 피아노와 성악을 배운 엄마에게 아버지는 요즈음 아이들 말로 feel이 꽂혔었나 보다. 환상의 커플 이 된 두 사람은 통영을 주제로 노랫말에 곡을 붙여 이렇게 노래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했다.
 
통영은 아름다운 항구..바다냐, 호수냐
수면(水面)이 거울 같아 그 위에 떠있는 허공이
그 아래 또 하나 거꾸로 보인다.
세면경(洗面鏡)이냐 수정궁(水晶宮)이냐..
 
감성도 맞고, 교육도 비슷하게 받아 잘 어울렸던 두 사람.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 그 놈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Feel이 단단히 꽂힌 사랑은 길어야 3년이라고 했나. 환상의 커플이라던 두 사람은 그 당시에 흔치 않았던 이혼이란 걸 했다. 엄마가 차라리 무지한 분이었더라면.. 아버지가 좀 못난 사람이었더라면.. 할머니의 가슴엔 언제나 묵덩이만한 체증이 가라앉지 않았고, 불에 달구어 헝겊으로 싼 기와장이 늘 가슴 위에 얹혀져 있었다. 아버지는 흥이 많아 한 곳으로 몰입하면 많은 시간이 걸리는 분이셨는지,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느 한 곳에 빠져 영영 헤어 나오지 못했었나 보다. 어머니는 6.25전쟁으로내 위의 두 오빠를 잃었을 때에도 아버지의 행방을 몰랐다 했다.
글쎄다. 사랑이란 게 먼저인지, 자식이 더 소중한 것인지. 그 알 수 없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도 문제라면 문제다. 자기의 인생을 택하는 것을 우선 순위로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까. 난 아직 어리석게도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4남매는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상했다. 아버지께서는 그때부터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셨다. 교육에도 열정적이셨다. 중학교 입학 체력장시험 때였다. 아버지는 유난히 체육이 약했던 내가 염려스러우셨던지 시험날, 수위아저씨가 지키는 교문 철창 밖에서 멀리뛰기 하는 나를 향해 엉덩이가 땅에 닿지 않게 앞으로 뻗으라고 소리치셨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뿔싸 엉덩방아를 찧어버린 내 모습에 아쉬워하며 무릎을 치며 웃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중학교 내내 반장을 했던 딸이 대견스러워 세상이 온통 당신 것인 양 늘 자랑에 꼬리를 달았었다. 나는 모범생처럼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대학도 갔고, 결혼도 그렇게 했다. 지금 우리 부부는 탈없이 그리고 묵묵히 사랑하면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렇게 살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불같이 타오르는 사랑은 빨리 식게 마련, ‘서로 내어놓는 사랑, 서로 배려하는 사랑, 내 자신이 바보가 되어야 그 사랑을 지킬 수 있다.’ 는 것을 아버지는 왜 모르셨을까?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에게 못한 효도는 자식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말이 실감나고, 자식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내리사랑은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알 것 같다. 내가 심한 갱년기 증세로 고생할 때, 아버지께서는 나와 함께 병원에 가 주셨고, 어디든 내게 문제가 생기면 늘 앞장서 주셨다. 집중할 수 있는 골프를 하라고 권했고, 시니어 골프 회장이면서 이미 ‘싱글’ 이었으며, 나이 40부터 세 명의 코치를 두고 골프에 몰입하셨을 정도로 열정도 많으셨다.
망설임 없이 방황하다가 흔치 않은 헤어짐도 했던 아버지.
그래도 나는 그런 아버지를 사랑한다. 모든 것에 적극적이고,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시고, 하루하루를 파티 분위기로 만들어 행복하게 해주셨다. 노래를 좋아하셔서 명절 때면 어김없이 가족 모두 노래방에 가자고 하셨다. 노래 부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면서. 너무나도 멋스럽던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내가 불렀던 노래가 마음에 든다 하시며 테이프를 구해 오라고 하셨다. 칠십을 훨씬 넘긴 여느 분 같지않게 말이다.
2001년 12월 15일, 80세 되던 가을, 아버지께서는 골프대회를 마친 후 몸이 불편하다고 하셔서 검사를 받으셨다. 페암말기 그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은 손을 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의사는 2-3개월이라 했고, 아버진 그것도 모른 채 다음해 5월 제주도에서 당신이 주관하는 아시아 시니어 골프대회 준비에 온 신경을 쏟으셨다. 병실에 계시면서도 외국에서 올 회원들 명단과 인원수를 확인하셨고, 인사말을 일본어로 하실 거라며 원고 작성으로 들떠 있었다. 사위와 딸도 초대하겠다며 아버지의 머릿속은 온통 그 일로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그렇게 희망찬 분에게 죽음을 알린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 채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아버진 점점 기운이 떨어져 가고 있었고, 방사선 치료도 형식적으로 받았을 뿐이었다. 당신은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러나 내색을 안 하시며 강한 모습을 보여주시려 했다. 잉크 색 물감으로 선명하게 시침질한 것 같은 가슴부위를 방사선으로 치료할 때였다.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시고 명령하듯 “내 몸 조심스럽게 다루어요.” 그 와중에도 그런 위트로 나를 얼마나 당황하게 만드시던지.. 그럴 땐 몹쓸 병에 걸린 분 같지가 않았다. 입원할 때 벗어놓았던 양복과 구두는 집에 갈 때 꼭 입어야 한다며 챙기셨고, 목사님 심방 오시면 “일어나면 꼭 찾아 뵙겠습니다.” 라 던 아버지의 속내는 추하고 슬픈 모습으로 가기가 싫으셨던 것이다.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죽음을 아버지께서는 성품대로 멋지고 깨끗하게 마무리를 지으셨다.
그런 아버지가 너무 자랑스럽다. 다행이 아버지는 하나님을 믿으셨으므로 천국에 가셨을 것이다. 육체는 흙으로 왔다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아픔과 고통 없는 하늘나라에 가셨을 테고, 당신께선 후회 없이 세상을 사셨을 것이다.
병실 창가 밖 한강 위로 넘어가는 해 그림자가 강물에 비추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가는 어느 날, 흐르는 강물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제서야 아셨나 보다. 아가, 그 곡 한 번 들려 주겠니? 지긋이 눈을 감고 들으신 후에 이제 나 다 되었지? 그러시는 거다. 나는 의연하고 멋진 종말을 준비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감출 수 없는 눈물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강물 같은 사랑에 나는 꽃잎이 되어 떠다니는 사랑이 되어 차가운 거리를 떠돌다 다녀도 당신 모습 떠오르네요.
그 노랫말처럼 우리 모두는 떠다니는 꽃잎처럼 그렇게 세상에 부유하다가 영원한 하늘나라에 안주하는 것이다. 아버진 천국에서 보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편안하게 쉬고 계실 것이다.
 
우리 교회 소망동산은 곤지암에 있다. 거기엔 소망교회 성도의 묘라고 새긴 큰 묘비가 있고, 사시사철 은은히 찬송가가 들려오며, 주변엔 온통 향기로운 꽃바구니가 줄지어있다. 우리는 당신 뜻대로 화장(火葬)을 하여 그 곳에다 한 줌의 재가 된 육신을 흙으로 보내드렸다. 묘비는 있지만 누구 이름 하나 없다. 우리의 목숨을 하나님께서 거두시는 날, 세상의 권세, 명예, 재물 그 모든 것을 가진 자라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곳은 천국에 간 사람들만의 집이다. 그곳을 드나드는 많은 젊은이들은 죽음을 준비하며 오늘을 살아갈 것이고, 아버지처럼 곱고 아름답게 나이 들어 천국에 안주하고 싶은 맘이 우리 형제들에게도 간절하다.
딸이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을 심리학에선 일렉트라 컴플렉스(Electra Complex)라고 한다는데, 내가 그런 것일까. 아버지께서 가신 뒤 내 꿈 속에 오셨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얼마나 활짝 웃으시던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분명 천국에 계셨고, 나를 보고 웃고 계셨다. 세월은 빨라 아버지가 가신지 벌써 6년째로 접어들었고, 나도 갱년기의 고비를 넘기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하지 못한 말이 있다. 머리를 얹어주셨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도 열정적으로 골프를 하는데 딸이 싱글이 될 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시지.’ 아버지, 사랑해요. 그리고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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