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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박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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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될 대로 되라    
글쓴이 : 박병환    14-12-01 09:08    조회 : 19,220
 시내버스 오르는 계단이 힘들었다. 왜 이러지? 정류장에 다가갈수록 왠지 겁이 났다. 아까처럼 또 그러면 어쩌나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에 힘이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주말이 되어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광주고속 버스 계단이 보였다. 왜 그렇게 높이 보이는지역시나 아주 힘들게 계단을 올라 자리에 앉았다. 온갖 상념이 스쳐왔다.
 집에 와서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행동했다.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 내 방에 누웠다. 앙상한 서까래는 그날따라 더욱 휘어지게 보였다. 괜찮겠지, 그래, 괜찮을 거야 하면서도 다음 날 아침엔 눈 뜨기가 겁날 정도였다. 다행히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그럼 그렇지, 몸이 잠시 뱉어낸 트림 같은 것이었을 거야.
 하지만 올라오는 길에 증세가 다시 나타났다. 버스에 오를 용기가 나지 않아 택시를 잡았다. 택시 문고리가 들춰지지 않았다. “아저씨! 문 좀 열어주세요.” 택시 기사는 의아해 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건장한 남자가 손에 든 것도 없이 그 모양을 떨었으니 이해할 수 없었을 터이다.
 아침부터 바람이 거세던 날, ‘추풍낙엽 휘돌아 치는 원정령 서낭님께,’라는 노랫말을 떠올리며 개인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청진기를 대고 눈을 까보는 등 하더니만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외국의학사전까지 펼쳐놓고 학생은 아마도 아주 희귀한 근육무력증에 걸린 것 같다고 하였다. 말 그대로 시간이 갈수록 근육이 무력해진다는 것인데 현재로서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주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대학 4학년, 몇 달만 있으면 육군 소위가 될 몸에 탈이 나다니, 어머니에게 증세를 애기하자 피곤해서 그런다며 느긋하게 마음먹고 생활하라고 하셨다. ‘! 제발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날이 갈수록 일어서는 것이 힘들어졌다. 아침마다 이불을 힘들게 말아 그것을 지렛대 삼아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 일어나야 했다. 그런 몸으로 임관고시를 치르고 나왔다. 나를 기다리는 형님을 보고 펄쩍 뛰어 내려가다 데굴데굴 몇 미터나 굴렀던가.
 곧장 집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그제야 내게 큰 사단이 났다는 걸 아셨다. 한약을 먹이고 영지버섯을 먹이고 좋다는 것 다 거둬 먹이던 어머니의 눈빛은 평상시 각도보다 약간 높았다. 다 큰 아들을 화장실에서조차 일으켜 세워줘야 했으니 그 속이 오죽했을까. 그나저나 석 달 후면 입대(入隊)인데 ROTC 이 년의 탑돌이가 물거품이 될 것 같았다. 보병소대장이 되어 그것을 출발지로 삼아 이후 여정을 계획하려던 나였기에 오로지 참담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신의 계시처럼 울려오는 소리가 잇었던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사(酒邪)를 부르던 동네 형 앞에서 어른들이 입을 모아 하던 말이었다. “저것은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이야.”지금 나에게 닥친 이 상황 또한 인력으로 되지 않는 일 아닐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며 이 악물고 왔는데도 뜻대로 되질 않으니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하였다. 그 순간 마음이 왜 그리 편안하던지.
 아침에 일어나면 될 대로 되라라는 다섯 글자를 되뇌기 시작했다.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 해도 다른 사람보다 몇 십 년 앞서 갈뿐 인생 하직인사는 누구나 피할 수 없고, 장애인이 된다 해도 경우의 수를 감안한 역정을 각오하니 마음의 배수진이 쳐졌다. 억울할 것이 없었다. 또한 스물다섯이면 이보다 못한 삶을 산 사람들보다는 천수를 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될 대로 되라.
 목욕탕에 가고 싶었다. 몸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뜨거운 탕 속에 들어가자 온몸의 팽팽한 돌기들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무작정 달려오다 마비된 근육이 저릿저릿 살아나는 느낌도 들었다. 모든 세포들이 새롭게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도 이랬을까. 그곳은 내가 십 개월 동안 머물면서 세상살이를 준비하고 기운을 얻던 곳간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다 곳간의 기운이 소진되었으니 지금부터라도 다시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준히 목욕탕에 다니며 조금씩 나아진 나는 학교 운동장을 걷기로 했다. 내 운명을 될 대로 되라하며 부려두었지만, 그래도 좋은 운명에게 희망을 걸고 걸었다. 걷다 지치면 교정의 버드나무 앞에 멈춰 서곤 했다. 졸가리가 하나가 유난히 크게 들어왔다. 세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파르르 떨고 있는 졸가리, 그가 동지로 보였다. 내 가슴은 어느새 무성했던 그 잎새들은 어디에 떨구고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너 또한 될 대로 되라하며 서 있으니 이 계절이 지나 봄이 되고 여름이 오면 다시 푸르게 일어나겠지. 온 산하를 물살처럼 너울대며 뒤덮고 있겠지.
 이듬해 꽃피는 삼월이 왔다. 초순에 임관식을 하고 광주의 보병학교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을 때도 모든 것은 될 대로 되라에 맡겼다. 신기하게시리 이 말을 되뇔 때마다 주술(呪術)과 같은 힘이 솟구쳤다. 고된 일상이었지만 운동을 멈추지 않앗다. 꽃샘추위에도 온수가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샤워장은 내 전용 체육관이었다. 몰래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문 쪽의 발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던 그때가 내 인생거울의 화석이 되었다.
 ‘될 대로 되라하면 삶을 막 살거나 포기한 사람이 쓰는 말이라고 했다. 나에게도 그런 고정관념이었었다. 하지만 젊은 한 시절, 벼랑 끝에서 답을 찾지 못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삶의 위로이자 구원의 말이었다. 세상에 대한 원망, 돌변한 심성의 포악질이 벼랑 끝자락에서 무장해제 당한 채 스스로를 주워 담도록 하던 말이기도 하였다. 정화(淨化)는 구만리 번민의 종착지였다. 그리고 나서야 길이 보였다. 단순하고 우습게 보이는 것들도 길이 될 수 있음을 아니, 스승임을 알았다. 오십 줄이 넘어선 지금 나는 누구보다 튼튼하고 단단하다. 또 다시 벼랑이 찾아온다 해도 겁나지 않는다. 쩌렁쩌렁 울릴 만큼 소리쳐 주겠다. 될 대로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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