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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박의 맛    
글쓴이 : 박용호    26-02-28 23:52    조회 : 29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 발생 혹은 자신의 실수로 독박을 쓰는 경우를 당한다. 독박이라고 함은 ‘특정 책임이나 업무를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혼자서 전적으로 맡아야 하는 상황’을 이른다. 이를테면 독박 육아, 독박 지불, 독박 책임 등이다.

1980~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고스톱’이라는 화투놀이가 대유행을 탔다. 회사 점심시간, 퇴근 후, 계곡 야유회 등을 가리지 않고 보통의 한식당에는 의례 화투와 군모포가 세트로 준비되어 있었다. 냉정한 승부의 세계인 고스톱에서 ‘독박’이란 용어가 탄생했다.
더 높은 점수를 내려는 욕심으로 ‘고Go’를 선언했는데, 다른 상대가 먼저 3점 이상을 내버리면 ‘고’를 선언한 사람이 제3자의 점수까지 포함해 두 사람의 점수 합계를 혼자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하나이고 또 다른 경우는, 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독주를 하여 대형판이 생길 것 같으면 다른 3자가 점수가 나도록 결정적인 패를 내주어 자신이 독박을 쓰는 경우이다. 큰 희생을 줄이는 방법이다. 나도 한때 고스톱에 빠져 동료들과 밤을 새우고 새벽에 귀가한 적이 많았다.

종합상사의 매니저 시절, ‘독박’을 쓴 쓰라린 경험이 있다. 동유럽 지사장이 보낸 발주서에 따라 해당 국내 제품을 거의 1~2달 간격으로 실어 냈다. 새로운 발주서가 도착해 국내 업체에 생산을 지시하고 제품 선적까지 마친 상황에 갑자기 지사장한테서 긴급 연락이 왔다. 발주서가 잘못 나갔으니 오더를 취소하고 선적을 중지해 달라고.
전화로 따지고 설명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확인해 보니 지사장이 전월에 보낸 발주서를 착각하고 반복 오더라며 다시 보냈다. 실무 담당자의 “추가 반복 오
더”라는 말만 믿고 상세히 검토하지 않은 나의 실수였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꼬여갔다. 제품은 이미 배에 실려 유럽으로 항해 중이었다. 제조사는 정당하게 물건을 넘겼으니 물품대가 적힌 은행 네고용 인수증을 은행에 제시하면 즉시 현금화 됨을 요구할 것이 뻔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반복 오더가 흔한 일이라 상부에 보고 없이 제조사에 제조를 요청했다는 점이었다. 이제 제조사로부터 대금 요청이 오면 상부에 보고할 수밖에 없고, 사태에 대한 질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직속 중역은 인사권을 무기로 부하 직원들을 함부로 다루는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중간 간부로서 중역의 불합리한 지시에 재고를 요청하는 건의를 몇 차례 한 죄(?)로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일이 커지면 직속 상사들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 뻔하여 차장에게만 상황을 알리고 내 책임하에 처리하겠다고 했다. 차장도 부담스러운지라 상부 보고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실무 담당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태평하게 보였다.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 찬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급한 마음에 제조사를 두 차례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대금 지급 연기를 부탁했다. 제조사 측은 ‘자기들도 자금 사정이 어려워 대금이 늦어지면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며 거절했다. 할 수 없이 인수증을 건네주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은 인사 조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찼다. 완전히 사태의 책임을 지는 ‘독박’ 신세가 되었다. 부서에서는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외롭게 무게를 짊어진 파수꾼.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인수증이 은행을 통해 회사 재정부로 돌아오는 날짜는 대개 3일 이내. 그 시간 안에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고뇌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문득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회사 자금 업무를 담당하는 재경본부의 임원이 내 신입 사원 시절의 부서장이었다. 오가며 간간이 인사를 드려왔던 사이라서 도와달라고 사정해 보기로 했다.
인사를 드리고 서서 망설이는 나에게 “무슨 일 있나?”라고 물었다. “제가 실수로 사고를 쳤습니다. 도움을 청하려고 왔습니다”라고 운을 뗀 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옛정을 생각해서인지 내가 처한 사정이 딱해 가여운지 임원은 즉시 담당 직원을 불러 인수증이 돌아오면 대금 지불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나에게는 “항해 중인 제품은 독일 법인에 연락하여 함부르크 항에 잡아두라”라고 했다.

그 순간, 칠흑 같은 먹구름이 낀 바다에 갑자기 등대불이 켜졌다. 옛 부하를 질책하지 않고 담담히 도와준 측은지심이 너무도 커보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서는 발길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 저런 리더가 되어야지’ 하고 혼자 되뇌었다. 내 담당 중역이 나중에 이 상황을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행히 별다른 소란 없이 일이 마무리되었다.
직속 상사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불똥이 위로 번지지 않도록 혼자서 감내하고 있던 젊은 매니저의 절박했던 심정을. 실무 담당에게도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실무담당자와 소주 한잔 기울이며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라고 했다.

강산이 몇 번 변한 후 도움을 준 옛 부서장에 대한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 소식이 끊겼는데 잠시 한국을 방문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연락처를 입수하여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오래 전 신세를 졌던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내 저서 『뜨겁게 전진하고 쿨하게 돌아서라』를 선물했다. 정작 부서장은 나에게 도움 준 일을 기억하지 못했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라고 했다. 선물한 책에도 당시 사고 쳤던 이야기가 실려 있음을 설명하고 작별했다.

독박의 무게를 혼자 짊어질 때도 있지만, 그 무게를 나눠줄 따뜻한 손길도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혼자가 아니고 외롭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독박을 쓰더라도 청춘이 돌아온다면 못 먹어도 Go! 무조건 Go!를 소리껏 외칠 것이다.

** 이 글은 수필집 『비 온 뒤가 아니어도 무지개는 볼 수 있다』제3장 '서로의 선물이 되어'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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