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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 넌 진국 놓친거야    
글쓴이 : 노정애    12-05-16 17:49    조회 : 5,907
 
                                                ‘숙’ 넌 진국 놓친거야         
                          
                                                                                                                 노문정(본명:노정애)

  '숙'은 남편의 일기장 속에 애틋한 추억으로 남은 여인의 이름이다.  그의 일기장을 처음 보게 된 것은 결혼 후 4년 만에 첫 이사를 하면서다.  책장을 정리하다 숨겨진 듯 구석에 있던 두툼한 공책 두권이 내 눈길을 끌었다.  펼쳐보니 깨알같이 촘촘히 써 내려간 익숙한 글씨 속에서 이상과 현실을 고민하며 청춘을 보낸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중간쯤에서 숙이 등장한다. 내용으로 보아 콩깍지 낀 눈에 비친 그녀는 미인에다 상당한 재력가의 딸이었다.  군대에 갔다온 가난한 복학생과, 대학원에 다니는 그녀는 시작부터 왠지 TV속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솔직한 감정표현과 간지러운 느낌들로 가득한 글을 읽는 순간마다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 훤히 그려진다. 
 명절에 귀성 고속버스를 타고 10시간을 함께 가면서도 헤어질 때 아쉬움만 남았다는 상대성 이론부터 주고싶은 선물도 사주지 못하는 주머니 사정까지....  자신이 넘지 못한 벽 속에서 얼마나 많은 밤들을 하얗게 새며 그녀를 그리워했었던가.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조차 다니지 못하는 상황과 부모 형제들의 고민까지 끌어안고 있던 그에게 그녀는 청량제요 안식처 같은 존재였다. 
 허나 그녀는 그와 헤어졌다.  여러 가지 상황들이 그녀에게는 부담이었다.  붙잡지 못하는 그 또한 자신의 처지를 잘 알기에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이별 후 그는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  14년 간 부부로 살아온 내 생일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그녀의 생일은 꼬박꼬박 기억해서 일기장에 생일 축하한다고 적고 있다. 그녀의 허리 치수도, 좋아하는 음식이며 버릇까지 많은 것들이 툭툭 터져 나와 그를 가슴 시리게 하는 것 같다. 
 나의 심통을 건드린 이 일기는 그가 취직을 하며 끝이 났고, 한참 뒤에 나와 만났으니, 기분은 묘해지지만 열 받을 이유는 없다.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나에게 보낸 사랑의 시들이 대부분은 그녀에게 바쳐졌던 작품들로 재활용되어 온 것이며, 결혼날짜를 잡은 후 부산에서 서울까지 온 나를 끌고 간 곳이 그녀와 첫 키스 장소인 석촌호수였다는 등등이다.
 잔뜩 폼을 잡은 정장 차림에 높은 구두를 신은 나를 세 바퀴나 돌리며 말없이 걷기만 했을 때 아마도 그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뚱뚱한 몸을 이고 있는 하이힐이 어찌나 힘들었던지 난 3일 동안 몸살을 했다. 이 여자와 결혼한다고 신고식이라도 하고 싶었나보다.
 재활용된 시들을 보면 둘 중에 하나라도 엮어 결혼했으니 그 시들은 제소임 다한 것이고, 지금은 내가 아이도 둘이나 낳고 사는 안주인이니 세월 속에 묻어버린 아픔을 들추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세상이 정말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자조적인 말과 그녀를 떠나 보내며 느꼈던 자신의 환경, 생활고등 넘어야 할 벽이 많았던 그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라  괘씸함보다는 가슴 한쪽이 쏴하니 아려 오는 연민이 생겼다. 
 그녀는 그의 무엇을 보았을까?  가슴속에 뜨거운 불길을 보기는 했을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너무 크게 본 것은 아닐까?  많은 질문을 던져 보지만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다.
  일기를 보기 전에 알지 못했던 그를 나는 다시 보기 시작했다. 
부모 형제간의 맹목적 사랑이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이 득이라면 득일 것이다. 임신 9개월 때 남산만한 배를 끌어안고 잠 못 드는 나를 위해 매일 저녁 1시간씩 노래를 불러주어 감동시키기도 했고, 10년여 다니던 직장인 은행이 갑자기 퇴출 되었을 때도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먼저 위로하는 듬직한 가장인 그.  친정아버지의 갑작스런 입원과 오랜 병원 생활 때 늦은 퇴근이라도 매일 병원에 들려 챙겨주는 자상함까지 가졌으니 함께 살기에는 썩 괜찮은 사람이다. 
 어차피 내 사랑이야 외눈박이 사랑으로 한쪽 눈감고 그를 본다.  단점은 감겨진 눈으로 못 본체하고, 장점은 뜬눈으로 보아 기꺼이 칭찬하며 산다.  물론 살면서 두 눈 번쩍 뜨고 살아 이혼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갈 때까지 가고서야 대화를 생각해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그일 이후 다시 한눈 질끈 감고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왔다.    
  세계에서 이혼율이 두 번째라고 지난해 언론이 시끄러웠다.  통계방식이 조이혼율로 매년 발생한 총 이혼 건수를 결혼한 수에서 나눈 것이다. 허나 이는 동거가 많은 유럽과 비교되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법원 행정처가 이혼율의 적절한 계산방법을 내 놓았는데 특정 시점의 혼인경력자의 총 혼인횟수를 분모로, 같은 시점 이혼경력자의 총 이혼횟수를 분자로 놓고 계산한 백분율을 제시했다. 
 이 방법에 따르면 2004년 1월말 현재 이혼율은 9.3%이며 부부 11쌍중 1쌍이 이혼한 셈이다. 2003년에는 하루평균 458쌍이 이혼했다고 한다. 그중 47.7%는 결혼 10년 이내의 이혼이다.  사유를 살펴보면 성격차이가 45%, 경제문제가 16%, 가족간의 불화가 13%순으로 나타났다.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란 형제도 이해 못할 것들이 많은데 하물며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과 함께 살기란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부부란 어차피 인생 동업자다.  굳이 커다란 이익을 보겠다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 조금씩 손해를 보며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숙’, 그녀는 좋은 사람을 만났겠지?  가끔 남편이 꼴 보기 싫을 때 그녀가 할 고생을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녀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그와 인연이 닿았던 사람이라면 잘 살아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도 난 그의 일기를 보고 있다.  그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삼류 소설을 보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이다.  하루종일 전화 한 통 안 하는 사람이 웬일로 전화를 했다.
 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괜히 뜨끔하여 웬일이냐고 물었다.  혼자 있다고 점심 적당히 먹지말고 잘 챙겨 먹으라고 한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내게 길거리에서 행상을 하는 늙은 부부를 보았는데 함께 점심을 먹는 모습이 보기에 좋더란다.  늙어도, 힘들어도 아내가 있어야 한다며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전화를 끓었다. 난 작은 일에도 아내의 소중함에 감사할 줄 아는 그가 참 고맙다.  일기를 덮으며 그녀에게 말하고 싶다.
“숙, 넌 진국 놓친거야.”    
 
                                                                                                     <책과 인생>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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