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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 봄을 기다리며    
글쓴이 : 노정애    12-05-16 18:56    조회 : 5,993
 
 네 번째 봄을 기다리며 
 
                                                                                                               노문정(본명:노정애)

  흔히 봄을 희망과 축복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나의 동서 고향은 포항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로 형제들 7남매 모두 중학교 때부터 객지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긴 겨울 방학이 끝나고 봄이 오면 형제들은 뿔뿔이 외지로 떠나야 했다. 버려진 듯 남겨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일인가. 동서는 반복되었던 이별의 기억 때문에 사계절 중 봄이 제일 싫다고 한다. 내게도 슬픈 봄은 있었지만 지금은 설레임으로 기다린다. 마흔세 번을 맞으면서도 정작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세 번뿐이면서도 말이다.  
 부산 광안리에 살던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 2년을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 외가에서 지냈다.  4남매를 키울 형편이 되지 않아 입하나 덜기 위해서였다. 입학을 며칠 앞두고서야 귀가 할 수 있었다. 
 새로 시작했던 공장의 한쪽에 작은 섬처럼 쓸쓸한, 대문도 없는 한 칸짜리 방이 날 맞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낡고 초라한 작은 술상을 앞에 두고 혼자서 소주를 마시는 아버지의 놀란 눈이 외할머니와 나를 보았다. 집으로 간다는 기대와 설렘은 엄하게 절을 하라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멀리 줄행랑 치고 잔뜩 주눅 들게 했었다. 엉거주춤 절을 하며 울음보가 터져 오히려 혼만 났었다. 식구들도, 친구 하나 없는 학교생활도 남의 옷 빌려 입은 것 마냥 어색하기만 했었다. 툭하면 눈물을 찔끔거렸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울보라는 별명으로 한동안 불렸었다. 그 봄 내내 나는 가슴앓이를 했었다.
  부모님은 분명 나를 안아 주었을 것이며 많이 컸다고 머리도 쓰다듬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 기억에는 혼자서 술을 마시던 초라한 아버지의 등만이 생각난다. 어린 내게 거대한 산처럼 기억되었던 당신의 등은 힘든 세월을 혼자 지고 계신 것 같이 힘겨워 보였다. 새로 시작한 공장이 한참 어려울 때라 몇 년 만에 만난 딸을 보는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아버지는 술잔에 시름도 함께 채우셨던 것 같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봄은 슬픔으로 남아 있다.
  중학교 입학식에서 내가 입은 교복은 누군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낡고 번질번질한데다 치마는 짤막했다. 유난히 나무와 꽃이 많은 교정이 오히려 내 자신까지 초라하게 느껴져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녔었다. 하지만 같은 반 친구 둘과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낡은 교복에 대해 기죽을 틈도 없이 옆에서 웃어주는 친구들 덕분에 마음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했었다.  든든한 친구들이 양쪽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때서야 교정의 꽃과 나무도 눈에 들어왔다. 기쁨이 두배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친구들과는 3년을 찰떡처럼 붙어 다녔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다르게 다녔어도 편지와 전화로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으며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했다. 아이들도 같은 또래다. 오래 만나면 닮는다고 하더니 많은 것이 비슷하다.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가장 먼저 달려와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친구들이다. 두 번째 봄은 평생을 함께할 친구를 내게 선물해 준 기쁨으로 기억된다.
  난 서울에 사는 남자와 핫라인을 그리며 연애를 했다. 헤어지기 싫어지고, 전화비와 여비로 쓴 데이트 비용이 부담스러워질 즈음에 결혼 날을 잡았다.
  주말이면 서울에 가서 살집을 구하고 신혼살림을 준비하며 정신을 반쯤은 길거리에 내려놓고 다녔었다. 복잡한 결혼준비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했었다. 멀리 시집보내는 부모님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마냥 좋아서 들떠있었다. 가끔씩 엄습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머릿속을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만들어 그와 다투기도 했지만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바보처럼 좋아서 웃기만 하는 신랑 신부를 앞에 둔 주례사 선생님의 첫마디.
 “이 화창한 봄날, 여기 두 사람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그때서야 생각났다.
 ‘아! 봄이었구나.’
 그렇게 세 번째 봄은 행복하게 도둑맞았다.
 결혼은 현실이다. 아주 가끔은 후회하며 그 때를 기억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교적 순탄하게 살고 있는 지금까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런 도둑은 두 번 맞아도 좋으리라.
  봄이 오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슬픔도, 기쁨도, 행복도 다 보여주었기에 설렘과 기대를 갖게 한다. 어떤 모습의 얼굴을 하고 내게 올지 모르기에 나는 네 번째 봄을 기다린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봄. 아픈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을 봄. 그리고 내 가슴을 태워줄 수도 있을 봄. 나는 새로운 도전으로 그런 봄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봄이 싫은 동서에게 여름이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네 번째 봄을 기다리는 내게 아무 일 없이 여름이 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년 봄을 다시 꿈 꿀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가속도 붙은 세월도 두렵지만은 않다.
 
                                                                              <에세이 플러스>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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