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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이 바닥을 치다    
글쓴이 : 노정애    12-05-16 18:59    조회 : 5,803
 
양심이 바닥을 치다 

                                                                                                             노 문 정 (본명:노정애)
   
 친구와 약속이 있어 여유있게 집에서 나왔다. 1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동대문역 구내에는 다양한 액세서리와 작은 지갑 등 만원이면 종류별로 몇 개는 살 수 있는 가게가 있다.  자투리 시간에 값싸고 질 좋은 것이 있나 해서 오색찬란한 동전지갑이 쌓여있는 가판대를 기웃거렸다. 주인은 내가 구경꾼임을 눈치 챘는지 다른 손님에게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 위에 떡 하니 올려진 명품 장지갑을 발견했다. 횡재한 기분으로 재빠르게 집어보니 두툼하고 묵직한 지갑 속에는 각종 신분증과 카드들이 김장 배춧속처럼 꽉 차있었다. 현금도 꽤 많았다.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주인조차 관심이 없고 지갑을 찾겠다며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신분증을 보니 나보다 10살 아래의 예쁜 얼굴이 그 속에 콕 박혀 주인도 아닌 내게 ‘김치’하며 웃고 있다. 
  유실물 센터에 갖다 줄까? 가게 주인에게 맡길까? 현금도 많으니 본인에게 직접 전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직 약속시간 까지는 약간의 여유도 있었으며 난 비교적 양심적인 사람이니깐.
  연락처를 찾고자 지갑을 뒤졌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카드며 온갖 신분증들중 내가 찾은 것은 10명의 전화번호가 적힌 작은 쪽지 한 장이 전부였다. 처음부터 차례대로 전화를 걸었다. 결번입니다. 그런 사람 모릅니다를 거쳐 받지 않는 전화까지. 내 인내심을 시험하듯 여섯번째에서야 본인이라며 쪽지에 이름이 아이 이름이라고 했다. 그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동대문역이라는 말에 자신이 지하철 반대편 것을 타고 가야 되니 도착해서 전화하겠다며 전화를 끓었다.
  그녀와 통화되기까지 30분이 훌쩍 흘렀으며 언제 올지 모를 그녀에게 지갑을 주고 가려면 또 30분 이상이 걸릴 것 같았다. 친구에게 조금 늦겠다는 전화를 했다.
  서울 지하철 유실물 센터에 들어오는 물건은 한해 평균 3만여개이며 이중 주인을 찾지 못하는 것이 40%가 된다. 주인의 무심함에 하루아침에 찬밥신세가 된 물건들은 1년 반이 지나면 복지시설이나 필요한 곳으로 옮겨진다. 작은 손가방에서 고가의 캠코더까지 유실물 센터에 보관할 공간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얼마전 TV뉴스에서 보며 자기 물건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요즘의 소비 풍조에 약간 씁쓸했었다. 그러나 각종 신분증이나 카드들은 범죄의 표상이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라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의 심정이야 당황함 이전에 공포에 가깝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난 지갑을 잃어버린 전과가 두 번 있다. 한번은 신혼여행지에서 소지품을 잘 모셔 두고 멋진 배경 찾아서 사진을 찍고 오니 지갑만 바람처럼 사라져버려 여행 기간 내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걸 가져간 양심도 없는 사람은 일주일치 생활비 걱정은 안했을 것이다. 그 후 신분증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창원에 사는 동생 결혼식에 참석 했을때 예식장에서 소매치기를 당했었다. 친구 중 하나는 낡은 지갑에 돈만 딸랑 1000원일 때 소매치기 당해 치기 범에게 미안하더라는 말을 했지만 내 돈 가져간 양심 불량인 그놈은 수입이 짭짤했다고 헤벌쭉 웃었을 게다. 꼭 현금이 많을 때만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 내 돈에 무슨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카드 분실신고를 하며 며칠을 속앓이하고 있는 중에 그 예식장에서 전화가 왔다. 소각장에서 지갑을 발견했다며 현금만 없어진 것 같은데 보내주겠다고 했다. 카드며 모든 신분증들이 다 있다는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지갑은 화려한 꽃무늬 손수건에 싸서 포장까지 정갈히 한 후 자신의 식장에서 이런 일이 생겨 죄송하다는 메모와 함께 보내왔다. 잃어버린 돈 대신 따뜻한 사람들의 정을 덤으로 얻은 것 같아 한동안 기분이 좋았다.
  그녀를 기다리며 내가 참 양심적이라는 자부심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직접 주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것 같아 스스로 대견했다. 돌려받고 좋아할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내 기분까지 괜히 좋아졌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마시는 격으로 혹 사례라도 하면 나도 경험 있어 안다고 사양할 말까지 생각해 두었다.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만날 장소를 정하고 기다리는데 지갑 속 웃는 얼굴의 주인공이 땀을 뻘뻘 흘리며 허겁지겁 달려와 두리번거린다. 어설프게 자신의 지갑을 들고 있는 내게 “전화하신 분이세요?”라고 묻더니 “네”라는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낚아채듯 지갑을 가져간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남긴체 팩 돌아서서 성큼성큼 가버린다. 잠시 난 먹던 사탕이라도 빼앗긴 듯 얼떨떨했다. 기다리며 했던 모든 생각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뭐 저런 게 다 있어’라는 말이 목 밑까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기다렸던 한 시간도 6통의 통화료도 모두 아까워졌다.   
  몇 발짝 걸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딱 멈췄다. 이런 내 마음을 읽었을까? 순간 속이 뜨끔했다. 그녀가 지갑을 열더니 카드를 챙겨보고 현금을 꺼내 한 장씩 세어본다. 아마도 그때 내 양심이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던 것 같다. 그녀를 쫓아가서 당신 지갑 맞아요? 묻고 싶었다. 현금은 다 있어요라며 빈정거린 후 물건 찾아준 사람한테 이런 대접 이 어디 있냐고 마구 따지고 싶었다. 혹시라도 현금이 모자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총총거리며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슬금슬금 찾아준 것을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현금 몽땅 내가 가지고 그냥 휴지통에 넣었으면 횡재하는 건데. 다시는 지갑 같은 것은 줍지 말아야지,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와도 유실물 센터에 맡기거나 다시 버려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런 양심을 가진 날 30분이나 기다린 착한친구는 늦은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네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고 했지만 분한 마음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하기야 잃어버린 지갑을 찾으면 카드와 현금이 제자리에 다 있는지 확인하는게 옳을 것이다. 처음 전화 통화했을 때 내용물들이 다 제자리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하지 않은 것은 나다. 물론 그녀가 묻지 않았지만 그건 습득한 사람에 대한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돌려주면서 걱정하셨죠라며 내가 좀더 친절이 굴었어야 옳았다. 무슨 보상을 바라는 사람처럼 거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건네 본 것은 아닌지? 그녀가 별별 생각을 다하면서 그곳에 왔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번쯤 했어야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떠올랐다. 난 혹시라도 그런 일이 또 있을까 하여 물건을 습득한 가게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이러면서도 아이들에게는 도덕적 양심 운운하며 남의 물건은 꼭 찾아줘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녀 덕분에 3초만에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내 양심이라는 가면을 확인한 것뿐이다.  양심이 바닥을 치는데 3초면 충분했다. 바닥을 쳤으니 올라올 일만 남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형편없는 양심이다. 
 
                                                                               <책과 인생> 2008년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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