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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하이힐    
글쓴이 : 김명희    24-06-13 22:47    조회 : 3,113

 

 

          빨간 하이힐 

                                                     김명희

                                                     jinijuyada@naver.com 

 

 에나멜을 칠한 빨갛게 반짝거리는 7센티 굽의 하이힐이 스무 살의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운동화를 신고 있던 내 발에서 양말을 벗겨내고, 얇은 스타킹을 빌려 신게 만든 그 빨간 하이힐. 마침 그날 메고 갔던 빨간 핸드백과 어울려 꼭 사야할 것 같았다. 함께 간 친구들의 열화와 같은 부추김과 직원의 잘 어울린다는 말, 그렇게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하이힐을 구입했다. 빨간 힐을 신은 날이면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도 괜스레 건물 외벽의 유리를 들여다 보곤 했다. 빠르게 걷는 걸음위로 꺄르르거리는 스무 살의 웃음소리가 춤을 추고 있었다. 다리에서 하이힐 굽까지 이어지는 선처럼 내 마음의 선도 날렵한 곡선이 되어 전에 없이 아름다운 선을 이루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즐거웠다. 뒤꿈치가 조금 까져 살짝 피가 나는 정도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뒤꿈치의 고통이 어딘가 멋진 곳으로 가게 해 주는 보상인 듯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곤 했었다. 내 어깨에 힘이 빠지고 둥글둥글한 공처럼 굽어져 버린 것은 하이힐을 신지 않으면서부터였다. 어쩌면 굽어지면서부터 하이힐을 신지 못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듯이 나도 그 순서를 잘 모른다.

 생각해보면 첫 아이 임신을 안 그날 이후 십년가까이 힐을 신지 않았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반복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그저 편안한 신발이면 불편함도 큰 아쉬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굽은 어깨보다는 앞으로 밀고나온 배가 더 동그랬고 출산 후 그 자리에는  방긋방긋 웃는 아들이 한참을 동그랗게 매달려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높은 힐을 신고 어딘가로 떠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안고 있는 아이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맞추다 보면 온 몸과 마음이 따스해져 그런 생각을 금방 잊어버리곤 했었다.

 아이들이 내 어깨를 잡아당기며 그 온기를 전해주는 기간은 길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걷고 싶어서 그리고 함께 뛰고 싶어서 늘 편한 신발을 신고 대기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할 때도 한참을 자리를 비운 시기에도 나는 하이힐을 신지 못했다. 엄마는 이제 그 자리에 계시라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신발장 속의 높은 구두들은 어디에도 나가고 싶어지지 않는 나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다가 하나씩 없어졌다. 아이들과 함께 가는 길이 익숙하고, 함께 어디든지 가야할 것 같아서,아이들과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싶어서 늘 끌고 가고 따라 가려고만 했었나보다.

 얼마 전 구두가 필요하다고 하는 아이들의 말에 나도 모르게 아직은 필요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정장을 고르고 구두를 고르는 아이들의 옆에서 스무살의 내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멋지다고, 어울린다고 부추기고 말았다. 양복을 차려입고 구두를 신은 아이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쑥스러운 듯 곁눈질을 한다. “멋지다 아들!” 큰 소리로 외쳐 주었다.

 어딘가로 가고 싶다거나,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사 놓은 구두들은 여전히 신발장 안에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다. 장 안에서 구두의 빛이 점점 바래는 만큼 나의 무기력이 늘어간다. 아니 나의 피곤이 그 윤기를 바래게 하는 것 같다. 혼자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욕구는 혼자가 되는 순간 ‘함께 가고 싶다!’ 로 바뀌고 말았다. 벗어나고 싶던 나의 둥지는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지켜야 할 보금자리가 되었고 내가 나가서 만나고자 했던 것을 보잘 것 없게 만들어 버렸다.

 신발장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구두들은 조금의 힘겨움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발에게 원망을 한다. 나의 힐들은 나를 지탱하기 힘들어 하고 나의 발은 한곳만을 지향하는 힐의 그 뾰족함과 탄력 없음을 견디지 못한다. 익숙해질 때까지의 기분 좋은 통증은 상상만으로도 이미 너무 아프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 신발장에는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와 금장식을 한 윤기 나는 까만 샌들이 있다. 목이 긴 앵클형의 힐도 있다. 촌스런 꽃장식이 달리거나 핑크빛 얇은 가죽으로 속을 댄 뱀피 무늬의 힐도 하나 넣어두었다. 요즘은 백화점에 갈 때마다 공단을 덧대 만든 윤기 나는 힐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며칠 전 또다시 신발장을 정리했다. 낡아져서 가죽이 살짝 일어나려고 하는 구두 하나를 재활용 봉투에 얼른 버렸다. 신발장 안에 동그란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곧 메워 질 것이다. 눈독을 들이던 새 구두를 살 핑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구두를 사기 위한 하나의 핑계만큼 나에게 하나의 욕망이 분명 있는 것이겠지!

 분홍신을 신고 춤을 추던 동화속 소녀처럼 혹은 유리구두에 미친 듯이 발을 맞추던 신데렐라의 언니들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신에 발을 맞추며 웃던 스무살의 나는 없어졌다. 뛰쳐나가서 함께 춤을 추고 싶은 사람도, 내 발에 피를 흘리면서라도 만나고 싶은 이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힐에 발을 맞추고 싶다. 그리고 알고 싶다. 여전히 내 안에서 춤추는 내가 가진 욕망은 무엇일까?

 

 

                                   한국산문 2021년 4월호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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