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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노이의 설날, '뗏'    
글쓴이 : 오정주    25-01-28 23:53    조회 : 2,675

하노이의 설날

 진홍빛 꽃이 몽실몽실 피어난 복숭아나무와 금귤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오토바이 뒤에 실려 간다. 아기를 안고 탄 여자가 뿌리를 감싼 복숭아 꽃나무를 소중하게 옆구리에 끼고 가는 모습은 평화롭고 정겹다. 이 끝없는 행렬이 펼쳐지기 시작하면 베트남 최대 명절인 (Tết)’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복숭아꽃, 살구꽃 그리고 금귤나무는 악귀를 쫓아내고 복을 가져온다고 여겨져 설맞이 장식이나 선물로 인기가 많다.이런 명절 분위기는 도시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아파트 로비에도 커다란 금귤나무가 명절 분위기를 돋운다. 복을 기원하는 붉은 카드가 나무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춥고 긴 겨울에 맞이하는 한국의 설날은 폭설이 내리면 고향 가는 길이 어려울 때도 있다. 반면, 베트남은 따뜻한 날씨 속에서 꽃시장과 함께 명절을 맞이하니 여유롭고 아름답다.

 ‘(Tet)’은 한자어 뗏 능우엔 단(tet Nguyen dan)’의 줄임말로, 새해 첫 아침의 축제를 의미한다. 거리에는 축믕 남 무어이(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쓰인 현수막이 펄럭이고, 오토바이 물결은 여느 때보다 활기차다.

 하노이의 설날을 생각하면 우리 가족이 겪었던 황당한 에피소드가 먼저 생각난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기 몇 달 전 타국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이었다. 한밤중에 천지를 흔드는 따발총 소리가 들려왔고, 잠을 자던 우리 가족은 불도 켜지 못한 채 거실에 모여 부둥켜안고 공포에 떨었다. 남편이 베란다에 나가서 밖을 살피더니 저기 좀 봐라!” 하면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순간 휘황찬란한 불꽃 송이들이 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그제야 전쟁이 난 줄 알고 혼비백산했던 이방인 가족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 전야제 불꽃놀이와 골목에서 터트리는 폭죽 소리를 총소리로 착각했던 충격은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날 밤의 공포와 황당함은 두고두고 가족들 사이에서 '' 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되었다.

 뗏 연휴가 시작되면 베트남 전역의 도로는 귀성객들로 북적인다. 이 모습은 우리나라 설 풍경과 너무나 흡사하여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고향 생각에 마음은 벌써 달려가지만, 해외에 있다는 핑계로 서울에서 보은 시댁까지 7시간이나 고속도로에서 귀성길 정체를 겪지 않아도 되는 일만큼은 작은 위안이 되었다.

 베트남에서 뗏은 단순한 명절이 아니다. 일 년 내내 손꼽아 기다리는 가장 중요한 행사다. 가족뿐 아니라 이웃과 동료까지 함께 어울리며, 평소보다 더 넉넉한 인심을 나누는 시기다. 심지어 회사에서도 보너스를 주거나, 직원들에게 선물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설날이 다가오면 베트남 사람들은 가정에서 꺼이 네우cay neu라는 장식물을 만든다. 종이나 흙 등으로 만든 물고기와 말 그리고 방울 등을 장대 끝에 매달아 놓는데 방울 소리와 형상들이 부정한 것들을 쫓아 집안의 액을 막아준다고 믿는다.

 우리의 설은 새해를 탈 없이 지낼 수 있도록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는 날이란 뜻으로 신일愼日이라고 쓰기도 한다. 1년의 운수는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첫날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베트남에서도 새해 첫 손님은 그해의 운을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에 일부러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초대하기도 한다. 웃어른에게 세배는 하지 않지만, 그들은 대부분 절을 찾아가서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고 새해 소망을 빈다. 친척 일가, 스승 등의 집을 방문하여 덕담을 나누고 세뱃돈을 주고받는 문화는 우리와 비슷하다.

 우리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떡국을 먹는 것처럼 베트남 사람들은 설날이면 집집마다 바잉쯩을 만들어 가족과 함께 나눈다. 우리의 떡국은 나이와 시간을 상징하며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의미인데 바잉쯩은 네모난 모양으로 하늘과 땅의 조화를 상징하며, 찹쌀, 녹두, 돼지고기를 바나나잎으로 감싸서 만든다.

 타오에게 시장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파는 그 전통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자기 집에서 만든 바잉쯩을 바구니에 곱게 담아왔다. 돼지고기 때문인지 느끼한 떡을 먹는 것 같아서 내 입맛엔 영 낯설었다. 우리 입맛에 맞는 짜조(Chả Giò)라고 하는 베트남식 스프링롤이 있다. 돼지고기, 새우, 버섯, 당면 등을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튀겨 먹는데 역시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즐기는 음식이다.

 하노이에는 한국 떡집이 서너 군데 있으며, ‘종가라는 떡집에서는 배달 서비스도 제공해 새해에 떡국을 먹는 데 불편함이 없다. 떡국에 올릴 고명을 준비하고, 육전을 부치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삼색 꼬치와 스프링롤까지 만들면 해외에서도 푸짐한 새해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최근 하노이의 명절 풍경을 다룬 기사를 읽으며, 예전과 비교해 많은 변화가 있음을 실감했다. ‘이 여전히 베트남 최대 명절로 불리고, 연중 가장 긴 연휴로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으나 베트남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베트남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명절 풍속도 빠르게 변해, 전통적·가족적 분위기보다는 여가 중심의 명절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휴 초반에는 민족 대이동수준의 귀성이 이루어지고, 명절 당일에는 조상 제사를 지낸 뒤 가족·친지와 음식을 나누며 복을 기원하는 모습은 여전히 한국의 전통 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긴 연휴 후반에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우리가 살던 2002년의 베트남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산업화와 도시화를 통해 중진국으로 나아가려는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2010년대 들어 제조업, 기술 산업, 서비스업이 급성장하며 현재의 경제적 도약을 이루게 되었다. 과거에는 뗏 초반에 관광지로 가는 티켓을 찾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최근 몇 년간 국내 여행지인 다낭과 후에로 향하는 표가 2개월 전부터 매진될 정도로 트렌드가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베트남은 경제 성장에 따라 저출산 경향, 명절에 대한 인식 변화 등 가족 문화가 점차 변형되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도 베트남처럼 경제 성장과 현대화가 전통문화와 가족 중심의 가치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공존과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와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베트남과 유사한 점이 있다.

  킴마 스트리트의 창가에 서서 바라보던 진홍빛 복숭아꽃과 금귤나무, 그 생기 넘치는 풍경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내 가슴속에 선명하다 타오는 명절 휴가를 떠나기 전, 언제나 우리 삼 남매에게 자가 쓰인 빨간 봉투를 하나씩 선물로 주었다. 봉투 안에는 호찌민 얼굴이 새겨진 2천 동짜리 새 지폐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아이에게 때때옷 한 벌과 명절 보너스를 빨간 봉투에 넣어 선물했다. 한국에서는 붉은색이 크게 강조되지 않지만, 베트남에서는 붉은색이 복과 행운을 상징해 빨간 봉투를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다.

  수줍은 미소가 매력적인 그녀와 4년을 함께 하는 동안 많은 정이 들었다. 휴가로 자리를 비운 일주일이 늘 길게 느껴졌고 보너스를 더 챙겨 주고 싶어 고민했던 순간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명절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그녀의 따뜻한 미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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