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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오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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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랑자    
글쓴이 : 오윤정    14-11-25 22:21    조회 : 11,417
 
 
 
 
방   랑   자
 
 
 
 
 
 
 아파트 앞 빙판길을 한 남자가 미끄러질 듯 걷고 있다. 엄마의 손에 잡힌 아이도 종종걸음 친다. 앙칼진 소리의 바람에 나뭇가지 위 잔설이 흩날린다. 겨울그림 가장자리에 내가 있다. 라디오의 음악이 멈추고 DJ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흐른다. '귤껍질로 설거지를 하면 좋다'고 한다. 늘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아직 향기가 남아있는 귤껍질들. 새 스타킹에 담아 찻물이 밴 유리공병을 닦는다. 찌든 찻물이 조금씩 벗겨진다. 향도 상큼하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과일인줄만 알았는데 또 다른 쓰임새가 있다.
 
 스무 살 시절, 나는 헤르만 헷세의 <크눌프>가 싫었다. 크눌프는 첫사랑의 실연 후, 고향을 떠나 방랑의 길을 나섰다. 푸른 꿈과 의지를 버리고 무위(無爲)의 삶을 선택했다. 손풍금을 연주하고 춤을 추며 청춘을 보낸다. 사람들은 그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했다. 구속도 의무도 벗어버린 크눌프는 삶의 방관자였다. 생의 끝에서야 젊은 날의 방황과 허망함을 탄식했다. 병들어 찾은 고향의 설산(雪山)에서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 고독한 죽음은 꿈 없이 살아가던 나의 미래일 듯 두려웠다.
 삶 저편으로 계절이 오가고 세월은 물처럼 흘러갔다. 어느 새 지나온 길보다 남아있는 길이 짧다. 책장을 열고 탈색된 책의 먼지를 턴다. 크눌프의 삶을 다시 보고 싶다.
 
 크눌프는 첫사랑을 보기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기나긴 방랑에 청춘은 스러졌고 심신은 병들었다. 키 작은 나무와 담장, 푸른 꿈을 키웠던 고향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한다. 옆집 전향나무는 늙어 이끼가 끼었고, 방랑의 삶을 살게 했던 첫사랑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크눌프는 마을을 떠나 산기슭을 오른다.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신(神)이 다가온다. 크눌프는 생애의 무의미했음을 탄식한다. 헛된 삶을 살기 전 데려갔더라면 자신의 생은 잘 익은 사과처럼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원망한다.
 비탄에 젖은 그에게 신이 말한다. 노래하고 춤추는 방랑자가 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고, 그의 기쁨과 슬픔 속에 신도 늘 함께하였다고. "나는 너를 다르게 만들 수 없었노라"며 만족하라고 말한다.
 삶은 선택이 아니었다. 신이 지워준 삶의 무게를 벗고 크눌프는 자유와 안식을 얻는다. 때론 꿀과 포도주처럼 감미로웠고, 때론 회의적이었던 삶도  눈 속에 묻힌다. 고독한 방랑은 비로소 끝이 난다.
 
 크눌프는 머물러 사는 사람들에게 자유에로의 향수를 심어주고 주변을 밝혀주던 빛이었다. 허망한 삶과 죽음에 고뇌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다. 찬란히 타오르는 불꽃에서 유한(有限)의 진리를 깨우쳤고, 아름다움과 쓸쓸함의 공존(共存)을 찾았다.  크눌프의 삶에서 사랑의 치명적 파괴력과 죽음의 성찰을 본다. 존재의 미학도 만난다.
 둥근 것은 둥근 것으로 모난 것은 모난 것으로 저마다 존재의 이유는 있다. 온전치 못할지라도 제몫하며 살고 있노라 믿고 싶다. 넘어지고 부서져 세월의 끝에 초라한 모습으로 설지라도 "힘든 길 잘 왔노라" 위로받고 싶다. 스무 살 시절 가슴에 와 닿지 않았던 글귀들이 나를 위로한다.
 
 잿빛 나뭇가지 위 겨울바람을 이겨온 잎새가 봄을 기다리고 있다 나도 봄을 기다린다. 시간의 수레바퀴에 몸을 싣고 꽃, 바람과 어울려 방랑의 길을 나서고 싶다.
 
 
 
 
 
 
<한국산문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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