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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정호수의 삼겹삽    
글쓴이 : 김연빈    26-07-26 21:04    조회 : 72
   산정호수의 삼겹살(김연빈).hwp (18.5K) [0] DATE : 2026-07-26 21:04:27

산정호수의 삼겹살

 

김연빈

 

  산정호수는 명동이었다. 산정호수는 무릉도원이요, 아카사카요, 라스베이거스였다. 8사단 사병들에게는 그러했다. 포천 산정호수는 8사단 관할구역에 있는 국민 유흥지였다. 훈련을 하면서 산정호수 앞을 몇 번이나 지나갔다. 산정호수는 어떤 곳일까? 백록담처럼 산정(山頂)에 있는 호수인가? 산정무한(山情無恨)처럼 심금을 울려 산정(山情)호수인가? 아니면 고고한 선비가 시를 읊은 정자라도 있어 산정(山亭)호수인가? 산정호수는 사병들에게는 금단의 땅이요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는 8이란 숫자를 좋아했다. 그래서 8사단에 배속되었을 때 뭔가 인연의 줄이 이어지는 것 같아 좋았다. 8사단은 8이란 숫자로 해서 오뚜기부대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때로는 눈사람부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노란 바탕에 눈사람 모양 부대 마크가 앙증스러웠다. 사단 연병장 한쪽 구석에 부전상립(不顚常立)이라 쓰인 비석이 있었다. 넘어지지 말고 항상 서 있어라!

  제대를 3, 4개월 정도 앞둔 19833. 우리 소대가 잠시 산정호수 인근에 있는 포병부대의 경비업무를 전담하는 속칭 상주소대에 파견을 가게 되었다. 야외훈련이 많기로 유명한 오뚜기부대 사병들에게 경비근무 파견은 큰 인기였다. 하루 네 번 여덟 시간의 근무만 서면 훈련도 없고 자유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침 막 보급되기 시작한 칼라 TV에서 조치훈 명인(名人본인방(本因坊)과 후지사와 슈코(藤沢秀行) 기성(棋聖) 간의 기성전 7번 승부 제7국을 중계하고 있었다. 조치훈은 바둑계에 회자되는 3연패 후 4연승의 기적을 연출하며 기성을 쟁취, 일본 3대 기전을 동시에 획득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조치훈은 넘어져도 바로 일어서는 오뚜기 8사단 부전상립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감동의 기보를 복기하며 지내느라 마냥 여유롭고 천국일 것 같았던 경비근무 파견이 1주일여의 단국으로 끝나고 복귀하게 되었다. 소대의 짧은 행렬이 산정호수 앞에서 멈추었다. 소대원들의 갈구하는 눈빛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졌을까, 곧 전역하는 소대장의 하해와 같은 자비심의 발로였을까. 한 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 여기가 그 산정호수로구나!' 감동에 젖은 김 병장은 최 일병과 함께 천천히 호수를 둘러보았다. 호수는 산정에 있지 않았다. 아직 나목이 휑그런 호수 주변은 호정무한(湖情無恨)’을 쓰기에는 때가 일렀다. 옛 선비의 시가 걸린 정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산중에 있는 큰 저수지일 뿐이었던가?

  휴일인지 때 이른 상춘객들이 호반 여기저기에 자리를 펼치고 있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초봄의 미풍을 타고 사병의 코끝을 간질거렸다. 문득 컬컬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군인 아저씨! 고기 한 점 먹고 가요!" 눈을 마주친 두 사병의 발길이 소리 나는 곳으로 향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지.'

  노랗게 익은 삼겹살이었다. "소주도 한 잔 해요!" 머뭇거리는 사병에게 두꺼비 한 잔을 따라주었다. 최 일병이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김 병장은 괜찮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술잔을 부딪혔다. 혼자서는 못 마셔도 둘이서는 마신다. 동료가 있으면 없던 용기도 생긴다. 객기라고 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사제 소주 한 잔에 얼굴이 붉어진 두 사병은 삼겹살의 고소한 잔향을 새기며 초읽기에 몰린 기사처럼 서둘러 산정호수를 빠져나왔다. 눈에 보여야 할 소대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축에 걸린 참담한 마음으로 혼자 남아 있던 내무반장과 셋이서 말없이 앞서간 일행을 부지런히 쫓아갔다. 소대는 낭유리 여우고개에서 먹여치기를 당한 하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춘의 양광이 부드럽게 내리 쪼이는 고개 정상에 '빠따' 소리가 여우 울음처럼 처연하게 울려퍼졌다. 전역을 앞둔 소대장이 군기를 어지럽힌 최고참 사병을 응징하는 소리였다. 한국판 읍참마속(泣斬馬謖)’이 여우고개에서 재현되었다. 부대에 돌아와 샤워를 하는데 엉덩이가 무척이나 쓰렸다. 최 일병의 엉덩이는 삼겹살보다 더 붉고 소주병보다 더 푸르뎅뎅했다.

  30개월 가까이 쌓아온 인고의 세월이 삼겹살 한 점에 무너졌다. 편안과 여유가 보장된 말년병장의 권위가 소주 한 잔에 허물어졌다. 시간과 규칙은 지켜야 하고, 유혹은 견뎌야 한다. 잘못은 책임져야 하고 누구를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후한의 명신 양진(楊震, 54~124)에게 한 지방 관리가 찾아와 금 열 근을 내놓았다. “지금은 한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며 받기를 권했다. 양진은 하늘이 알고(天知), 신이 알고(神知), 네가 알고(子知), 내가 아는데(我知),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느냐면서 금을 거절했다. 여기에서 사지(四知)란 고사성어가 생겼다.

  미끼를 덥석 물어서는 안 된다. 소탐대실의 화근이 된다. ‘산정호수의 삼겹살눈앞의 작은 유혹이라는 의미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혹 흐트러질지도 모르는 마음을 바로잡게 하고 41년간의 공직을 큰 부끄럼 없이 마치게 하는 작은 밑바탕이 되었다.  ‘산정호수의 삼겹살이 양진의 사지처럼 유혹을 경계하는 뜻으로 자리잡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는 지금 4(四知)에 더해 5G(五知)시대, 6G(六知)시대를 맞고 있다.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CCTV가 알고(機知), 인터넷이 알고(網知), 구글이 아는데(電知) 어찌 부질없는 유혹에 손을 내밀고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있으랴.

  최 일병을 만나보고 싶다. 소대장도 함께 만나보고 싶다. 따스한 봄날 산정호수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고 여우고개를 넘어보면 어떨까? 소대장 지시로 작사하고 독도는 우리 땅의 곡을 붙인 소대가를 함께 불러보는 것도 괜찮겠지? 아니면 최백호는 어떨까? “지금 와 이 나이에 회한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이 가슴에 남아 있는 산정호수에 대하여 삼겹살에 대하여.”

 <<한국산문>> 20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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