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도 못 꾸나
-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고 -
이성화
너무 잘 생겼다, 그는. 한마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딱 내 취향이다. 그윽하지만 느끼하지 않은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몸속 어딘가에 있긴 있었는지 잊고 살았던 심장이 존재감을 심하게 과시하며 날뛰기 시작한다. 귓가에 와 닿는 숨결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게 날아와 마음마저 간질인다. 소중한 것을 다루는 양 조심스러운 손길이 목 뒤를 타고 허리로 내려간다. 적당히 단단한 그의 팔이 한순간 강하게 허리를 휘감는다.
‘헉, 내 허리! 허리 뽀사지겄네.’
허리를 꺾을 듯 감싸 안은 손길에 진짜로 허리가 꺾일 것만 같다. 아! 허리가 아프다. 이런 순간에도 허리통증에 끙끙거리는 내가 너무 싫다. 살며시 허리를 감싼 그의 손을 잡는다. 통증이 덜 느껴지는 자세로 바꿔보려고 그의 손가락을 꼬물꼬물 잡아 내린다. 꼬물꼬물? 이 느낌이 아닌 것 같은데, 손가락이 왜 이리 짧지?
그의 포근한 손길에 깊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힘겹게 올리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천장? 서 있었던 게 아니었나. 허리에 깔린 그의 팔을 빼내려고 보니 꼼지락꼼지락 발가락이 움직였다. 이건 분명 막내아들 발가락인데? 제 침대에서 잠들었던 막내 녀석이 어느새 옆에 와서 한쪽 다리를 내 허리 아래에 밀어 넣고 반대쪽 다리는 내 배 위에 올린 채 자고 있었다. 이러니 허리가 아팠지.
괜히 입맛만 버렸다 싶게 초반에 깨버렸다. 이왕 꾸는 꿈,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을 때까지 맘껏 머시기 거시기 다 하고 깼으면 좋았을걸. 아이를 똑바로 눕히며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 피식 웃고 말았다.
대막장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몰아보기 하느라 잠을 설쳐서 이런 꿈을 꿨나? 그러면 내가 바람피우는 꿈이 아니라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때려잡는 꿈을 꿔야 하는 거 아닌가. 드라마에서 ‘국민 욕받이’로 등극한 이태오는 단순히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부부 동반으로 만나는 친구들까지 한패로 만들어 아내를 속였다. 나도 이태오를 ‘국민 욕받이’로 만드는 대열에 합류해 박막례 할머니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같이 욕을 해댔다. “미친놈, 똥물이나 한 바가지 퍼다 줘라.” “땅그지 같은 새끼” “또라이들 집합소구먼” “꼴통 새끼” “낯바닥 보이도 않고, 저 잡놈 시키” “염병하고 있네.” 등등. 할머니의 찰진 욕설을 드라마보다 더 재밌어했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남성이 여러 여성에게 씨를 뿌리고자 하는 욕구는 친자확률이론(parenthood probability theory)에 따라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여성은 자신이 아이의 친모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으나, 남성은 친부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 친자확률이론이다. 그러니 전 생애를 통틀어 많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은 자신이 낳은 아이와 그 아이를 함께 돌봐줄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남성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가능한 많은 여성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고 바람피우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대의 불륜에 대한 질투 모습도 다르게 나타난다. 여성은 자신과 아이에게 쏟아야 할 자원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데, 남성은 뻐꾸기알을 대신 키우는 뱁새가 될까 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부부의 세계>에서 김희애가 맡은 역할인 아내, 지선우는 경제적인 면에서 남편에게 전혀 의지하지 않는 상태였다. 오히려 남편의 일에 자본을 대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남편의 불륜에 그런 불안감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가진 불안감은 남편과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늘 대하던 사람들이 모두 거짓을 말하고 있고, 아무도 믿을 수 없다면 그 두려움은 상상하기 힘든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한다면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실제로 드라마에서 지선우는 남편과 주변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신경 쓰느라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워 보이기도 했다. 결정타는 남편의 한방에 있었다. 지선우는 이혼하느냐, 한 번의 실수로 덮고 결혼을 유지하느냐의 갈림길에서 남편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을 택했다. 바람피웠지 않냐고. 국민 욕받이답게 이태오는 시치미를 떼고 적반하장격으로 나왔다. 그 결정적인 거짓말로 지선우는 복수를 결심했다.
꿈에서라지만 마누라가 다른 남자 품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도 모르고, 현실에서는 막내아들에게 침대 옆자리도 뺏긴 남편은 혹시 내게 거짓말한 것이 없을까? 워낙 말이 없지만, 속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라 거짓말을 못 하긴 하는데… 그런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바람을 피운다면 지선우 버금가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까. 어찌 됐든 바람은 지가 피우고 잘 자는 애먼 남편에게 눈 흘기고 있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꿈은 무의식을 드러내는 거라던데, 내 무의식에는 ‘내로남불’에 대한 욕망이 있었나 보다. 굳이 변명하자면 욕망이 있다는 것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니, 아직 실제로는 흔들리지 않았다는 거다. 그때는 더 큰 욕망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누구 말마따나 죽을 새도 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삶이 재미없어 꿈이라도 재미있게 꾸고 싶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내 남편은 나를 속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엉뚱한 꿈도 마음 놓고 꿔보는 건 아닐까. <부부의 세계> 지선우도 그토록 믿었던 남자가 그런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는 것에 요즘 아이들 말로 빡친 것이고.
다른 남자는커녕 마음 흔들릴 새도 없이 현실이라는 거대한 풍랑에 중심 잡기 힘들었던 나는 그저 잠잘 때나 곁눈질을 꿈꿔본다. 유튜브 스타인 막례 할머니의 욕설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부부의 세계> 같은 드라마나 소비하며….
<한국산문> 8월초 특집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