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위의 달빛
월화(月華)는 오 년을 나와 함께 일한 조선족 여인이다. 일이 고단하거나 몸이 아파도 단 한 번 병가를 내지 않고 독하게 일해 주었다. 그녀는 서툰 발음과 억양으로 한국어를 했지만 꽤 오랫동안 허투루 행동하진 않았다. 그녀와의 하루는 뜨겁고 치열했다. 말하자면 업주 입장에서 볼 때 매우 과분한 인재였던 셈이다.
월화는 잦은 병치레로 몸살을 앓곤 하였다.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하얼빈, 영하 사십 도의 혹한에서 단련된 체력도 이곳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나 보다. 가슴의 허함을 달래기 위해 뭐든 먹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는 그녀는 식사를 한 뒤 곧잘 체했다. 쉬는 시간마다 혹은 서빙하는 사이에도 그녀의 입은 뭔가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간식으로 계란을 쪄내면 “중국에서 달걀 서른 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한 판을 거의 다 먹어치웠다. 그런 뒤에는 여지없이 가방에서 침을 꺼내 열 손가락 끝에 피를 내는 것이었다.
그녀의 가무잡잡하면서도 매끄럽고 건강한 피부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를 보기 위해 오는 손님이 하나 둘 늘어나는가 하면 스리슬쩍 명함을 투척하는 얄궂은 사내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월화는 내게 조언을 구했다. “사모님요, 저 남자가 명함을 주는데 이게 무슨 뜻이에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듣도 보도 못한 직함을 보고 기가 막혔다. 그 남자는 주말마다 러시아인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하는 꽤나 점잖은 손님이었다. 눈부시도록 젊은 백인여성을 아내로 두고 있는 그가, 그럼에도 다른 몇몇 남자들처럼 우리 월화를 평소 마음에 둔 게 분명했다.
별 볼일 없을 테니 명함을 버리라고 하였다. 유부남과 만난다면 외국인인 그 아내는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필경 식당에서 일하는 아리따운 조선족 여인 한 명을 툭하니 건드려 보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심사였을 게다.
실은 이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것은 아니다. 개업초기부터 여종업원과 손님들 간의 로맨스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시간제로 일하던 아가씨 김 양도 박 양도 이 양도 손님과 눈이 맞아 일을 그만 두었다.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잘 살면 요행이요 축복이겠으나 때론 추문으로 남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래저래 힘들다던 월화는 식당 일에 결국 손을 놓았다. 중국에서의 이혼, 한국에서의 정략결혼, 사랑 없는 부부생활, 시집 식구들과의 불화, 함께 근무하던 여인들과의 다툼, 치근덕거리는 사내들을 뒤로 하고 그녀는 새 출발을 하는 듯이 보였다.
처음에 나는 조선족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졌었다. 한국으로 건너와 몸을 사리지 않고 돈벌어가는 그들에게 진저리치는 내국인들도 많이 보아온 터였다.
“조국이 어디라고 생각해요?” 하고 물으면, “나는 중국 사람이어요!”라고 당차게 대답하는 그네들을 보며 우린 혀를 내둘렀다. “돈 많이 벌면 다시 고향 가서 살 거예요.” 하고 쏘아붙이는 월화에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한번은 자녀들과 외식 나온 손님 한 분이 그녀에게 “물 건너 왔어요?”라고 묻자 월화는 “그래요! 물 건너 왔어요. 물 건너 와서 아파트도 사고 자가용도 샀어요. 왜요?” 하며 따지듯 대답하였다. 등에 호랑이 문신을 한 어떤 남자는 며칠을 두고 찾아와 갈비탕을 먹었는데 그것이 그녀와 모종의 만남이 되었다. 두 사람, 그러니까 과거를 묻어둔 선남선녀는 달포 넘게 서로 사귀게 되었다. 그 무렵 월화는 퇴근 때마다 갈비탕 이 인분을 포장해갔다. 아침에 출근하면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밤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오래 전 상하이(上海)에 갔을 때 가이드 역할을 해준 옌볜(延?)총각 광문 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버스 운전기사 옆에 서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 대해 쉼 없이 연설하던 그는 끝내 자신을 ‘어쩔 수 없는 서글픈 조선족’이라 하였다. “한국은 나를 낳아준 어머니요, 중국은 나를 키워주고 먹여준 어머니니 그 누구를 더하다고 말할 수 없다.”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사거리 역전 어귀 국밥집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우리 가게에서 뛰어서 이삼 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월화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시선을 피하고 제 할 일을 하였다. 얼핏 보았는데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 눈두덩이 깊게 패어 못 알아볼 뻔했다. 졸린 듯 가늘게 웃음 짓던 그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세월이 흘러 인상이 변해있었지만 분명 월화였다. 그녀도 나이를 먹으니 눈매교정을 하였나 보다. 건달과 살았다는 둥 주인을 홀렸다는 둥 동네에 악소문이 돌았지만 괘념치 않겠다. 나도 한때 “갈빗집 그 여자는 재취”라는 풍문을 안고 살았으니까.
월화와 헤어진 지 십 년이 지났다. 나는 지금, 그녀에 대해 어떠한 감정이 교차한다. 그것은 사상도 이념도 아니다. 월화를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녀를 볼 때마다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녀는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편해 보이니 좋은 남자와 잘 살고 있으리라. 조선족인들 한국인인들, 또한 그녀가 곧 죽어도 “나는 중국인이라니까요!”라고 외친들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서로 연관된 민족성을 지녔으면서도, 굳이 잣대를 들이대자면 아무런 혈연관계도 아닐 것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까닭은 모르겠으나, 월화에게 내내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골목 한가운데 하늘을 갈라놓은 듯 전깃줄이 드리워져 있다. 무리진 달은 저녁내 전선을 옮겨 다니다 멀어져간다. 내 진실은 그림자 밑에 숨었으니 선량한 달빛은 그 마음 알아주려나.
-《좋은 수필》202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