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시절
바람도 머문 겨울날 아침, 목적지 없이 길을 나선다. 걷다보면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다 보면 갈 곳이 떠오르는 법이라 굳이 시나리오를 완성하여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삶이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일.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처럼 ‘나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바람은 불어’ 올 테니.
내가 열 살께, 날맹이 촌이 올려다 보이는 언덕바지의 나지막한 슬레이트집에 세 들어 살았다. 천덕꾸러기 손주들을 키우는 주인 할머니, 막 돌 지난 아기를 키우는 이쁜이네, 딸 셋을 내리 낳고 또 아들을 낳게 해달라며 날이면 날마다 윗목에 시루떡과 촛불을 켜놓고 신주께 공양을 드리는 강희네, 칫솔에 약을 묻혀 눈썹을 까맣게 염색하고는 새하얀 양산에 뉴똥 한복을 차려입고 외출하는 과수댁 아줌마와, 얼굴에 마맛자국이 많아 화장품에 집착하는 고모언니. 그리고 아버지와 단 둘뿐인 영이 언니네와 우리 다섯 식구. 이렇게 한 울타리 안에 일곱 가구가 엉기어 앉았다.
하나의 작은 세계를 형성하는 이런 집들이 많게는 열 개에서 예닐곱 세대 정도로 나뉘었는데, 가구 수가 적을수록 방과 부엌이 차지하는 공간은 넓어졌다. 셋방은 짜임새 있게 연결되었으며 주인세대는 남향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햇살을 좀 더 넉넉히 받고 있는 형태라고나 할까. 주인 할머니네는 좀 더 안쪽 깊이, 우리 집은 입구 가까이 있었는데 모처럼 방이 두 개나 되었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집들은 대부분 흙으로 다져놓아 바닥이 고르지 못했다. 아이들은 넘어지기 일쑤였고 문턱 바로 밑에 놓인 잿빛 부뚜막은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옆집 아기가 데이고 아랫집 아이가 굴러 떨어졌다는 얘기가 간혹 들려왔다.
간간이 눈발이 뿌리던 초저녁, 동네 친구들이 놀자며 찾아왔다. 그날은 하필 빨래를 하는 날이었다. 나가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을 냈지만 아빠는 “가시내가 해 질 녘에 어딜 나가냐!” 하며 불호령을 내렸다. 나는 땔나무 한 단을 사와서 불을 지핀 뒤, 빨간 바가지에 뜨거운 물을 한가득 떠놓고 언 손을 담가가며 빨래를 주물렀다. 단수가 되어 날맹이 촌에 물이 나오지 않자, 도로변에 있는 공용수돗가에 물을 받으러 나온 사람들의 줄이 피난 행렬처럼 늘어져 있기도 했다. 집안의 맏이와 둘째들은 저마다 양동이와 플라스틱 통을 들고 나란히 줄을 섰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던 눈이 다 녹기도 전에 신작로 버드나무 가지에는 연둣빛 새순이 올라왔다. 거리를 비추는 햇살은 밝고 따스했지만 무채색 지붕 밑까지 태양이 비집고 들어오진 못하였다. 아이 서넛이 소꿉놀이를 하거나 어른 둘이 밀담하기 좋은 뒤꼍에는 여전히 이끼가 끼어있었고, 세월을 모르는 쥐며느리와 민달팽이가 곰질곰질 기어 다녔다. 햇볕이 숨어버리기 무섭게 밥 먹으라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동네를 달궜으며,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주점에는 불이 켜지고 등이 시린 아빠들은 외상술을 마셨다.
엄마를 잃은 아이가 대문 밖으로 나가려다 안집 개줄에 걸려 넘어졌다. 사슬로 묶어둔 큰 개가 일어나고, 그 바람에 아이는 문틈에서 휘청거렸을 것이다. 굵은 쇠사슬이 발등을 툭 치자 그 애는 고꾸라졌을 게 분명하다. 맏이가 넘어진 동생을 업고 언덕배기 윗집 대문을 두드렸다. 울음소리에 양쪽 문이 열리고 키다리 주인아저씨와 할머니가 뛰쳐나왔다. 얼굴과 옷자락이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보고 그들은 혼비백산하였다. 아이의 턱 주변이 심하게 찢기어 있었다. 다친 아이를 마루에 눕히고 아저씨와 그의 어머니는 약품 통을 가져와 정성껏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이듬해 여름, 열한 살 소녀의 눈에 잔혹한 광경이 목격되었다. 장정 서넛이 가로수에 누런 개 한 마리를 거꾸로 묶어놓은 채 몽둥이로 패고 있는 것이었다. 개는 고통스럽게 울부짖다 축 늘어졌다. 그들은 곧 죽은 개를 끌어내리고 언덕 아래 공터 한가운데 불을 지폈다. 그을음 냄새가 지천으로 퍼지고 회백색 연기가 꼬리를 물며 마른하늘로 피어올랐다. 눈을 감으면 그 광경이 악몽처럼 되살아나곤 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네 살배기 옆방 계집아이는 뒷집 사내아이와 놀다 얼굴을 물렸다. 잡일을 끝내고 귀가한 뒷집 아주머니는 잇자국이 선명한 계집애의 눈두덩 밑에 쌀가루 갠 물을 덕지덕지 발라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궁핍한 사람들의 터전이라니. 내 어린 날에는 왜 그리 넘어지고 다치는 모습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을까.
눈에 띄지 않는 가난에 대하여
누가 관심과 애정을 보일 것인가
생활의 중증 장애자, 구차한 천덕꾸러기 되어
몰매 맞는 가련한 왕따,
가난은 이제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이재무 시, <가난에 대하여> 부분
언덕 밑에서 불고 있는 개발의 이기로부터 비켜난 동네가 보인다. 걷다가 기억 위에서 멈춘 곳은 모처의 개미마을 골목 어귀이다. 그 길이 개미집처럼 연결되어 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낡은 의자에 앉아 시간을 지탱하고 있는 노파의 지팡이, 돌계단 밑에는 연탄재가 쌓여있다. 단열 안 된 지붕들은 옹색하게 붙어 있으며, 꽃그림이 수놓인 담장은 딜레탕트의 호의처럼 구경꾼을 맞는다.
희망의 어린이는 어디로 갔을까. 이곳에도 아이들의 웃음은 보이지 않는다. 낯선 손님을 부려놓은 마을버스는 종착지를 돌아 서정과 낭만을 태우고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가다보니 너무 먼 곳까지 왔나보다. 달동네 꼭대기에 올라 허름한 축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개미 같던 그 시절이 파노라마 되어 펼쳐진다. 시대는 삶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산마루의 겨울은 목이 마르고 기약 없이 높기만 하였다.
-2019 겨울《군포시민문학 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