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點)의 흔적
김창식
늦가을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는다. 곧게 뻗은 데다 제법 긴 길이어서 멀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면도로인지라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고 휑뎅그렁하다. 헬멧을 쓴 남자 아이가 킥보드를 타고 앞지른다. 나뭇잎 한 장이 멈칫 얼굴을 스치며 떨어져 내린다. 한눈을 파는 사이 아이와 거리가 멀어졌다. 아이는 산책로 끝에 이르러 점(點)이 되는가 싶더니 시야 밖으로 벗어난다.
눈이 시리다. 어디서 본 듯 낯설면서도 낯익은 상고머리 아이가 역사로 들어선다. 초등학교를 마친 아이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러 고향을 떠나는 참이다. 무엇을 잘못한 사람처럼 뒤쳐져 어른들을 따르던 어머니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막판에 앞으로 나선 어머니는 눈자위가 붉어진 채 아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기차가 출발하자 플랫폼에서 손을 흔들던 어머니의 모습은 화인(火印)이 돼 아이의 가슴에 남았다. 기적소리를 뒤로하고 어머니가 점점 작아지더니 점이 되었다.
아이는 여름방학을 맞아 그리던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반겨줄 어머니가 집에 없었다. 어른들이 말해주었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외가로 쫓겨 갔다는 것이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집에 머무는 날이 드물었고 밖으로 나돌았다. 쇠락해가는 여느 종갓집 장남이 그러하듯 다른 일, 이를테면 술타령이나 마작 같은 유흥에 빠져 밖에서 지내는 성 싶었다. 한번은 아이가 기생집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간 적도 있었다.
며칠이고 집을 비운 아버지가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온 날이면 온 집안이 시끄러웠다. 어머니에게 술추렴할 돈을 구해오라고 타박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이 생각으로도 아버지가 백번 잘못한 것 같은데 집안 어른들이 아버지 편을 들며 두둔하는 것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투고 난 다음날이면 길 떠날 채비를 하고 눈시울을 붉힌 채 아이의 손에 지전 몇 잎을 쥐어주며 당부하곤 했다. “큰아야, 외갓집에 다녀오마. 동생 잘 돌보고 있거라, 알것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어머니는 며칠이고 집을 비웠다. 아이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애먼 어머니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어머니를 내친 집안 어른들이 야속했다. 아이는 그 후로도 방학이 되면 고향에 내려오곤 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은 듯했다. 계절이 지나고 해가 몇 번 더 바뀌었다. 아이는 이젠 방학이 되어도 고향집을 찾는 것이 더 이상 내키지 않았다.
사춘기 어림에 들어선 아이에게 새로운 관심거리가 생겨났다. 등?하교 길에서 마주치는 세일러복의 여학생 얼굴이나 서양 영화 속 여주인공이 마음속에 들어와 앉았다. 아이는 소년의 강을 건너며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는 의식을 치루는 참이었나보다.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후였다.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날 때 어머니의 모습이 아이에게 그러했듯 아이 또한 어머니 마음속에 소멸하는 점으로 남았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청년이 된 아이가 고등학교 기하 시간에 배운 점은 지금까지 알던 점과는 사뭇 다른 것이어서 혼란스러웠다. 수학자나 철학자가 정의한 점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어떤 것’(유클리드), ‘쪼갤 수 없는 선(線)’(플라톤)인가 하면, ‘위치만 있고 크기는 없는 최소의 단위’(아리스토텔레스)다. 즉 점에는 너비가 없다. 그런데도 점과 점 사이에 선(線)이 있고, 선이 선과 만나 각(角)을 이룬다고 한다. 나아가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이 너비를 갖추면 면(面)이 된다는 것이다.
아이가 점에 대해 천착한 것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독문학을 전공하며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주제에 관심을 두어 점과 선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거듭하다 이들의 불완전한 존재양식에 맞닥뜨리게 됐다. 점은 찍히는 순간 존재가 소멸된다. 그럼에도 점으로 잇는 선이 있으며 그려지는 순간 되돌릴 수 없다면 이들은 가상세계에서처럼 ‘존재’하나 ‘실재’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대상이 원래 그대로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 표상이 발현, 투사된 것에 다름 아닌가.
대학을 졸업한 아이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어른들의 사회에 적응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한때 그것을 위하여 헌신하리라 다짐했던 가치와 믿음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는 과정이었다. 또 그러한 생활에 길이 든 자신을 보며 한편 놀라면서도 수긍하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밖에 없는 국면의 연속이었다. 점은 물론 선이나 면, 각 같은, 사는 데 큰 도움 안 되는 추상적인 개념으로부터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로부터 수 십 년이 흘렀다. 퇴직 후 노년의 문턱에 들어선 아이가 조우한 또 다른 점은 낯설면서도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디지털 커뮤니티 시대상을 반영하는 ‘노드(node?접속점)’가 그것이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는 개인이 한 개의 노드가 되어 다수의 불특정 노드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관계망을 무한대로 연결한다. 하지만 노드와 노드가 소통하고 연결망이 확장될수록 개인의 실체적 삶은 공허하기만 하다. 그럴수록 내면은 더욱 소외되고 황폐해지는 것이다. 점의 본디 속성이 관계의 끝맺음이요, 연결되는 순간 소멸하기 마련인 것을.
산책로 길섶에 놓인 벤치에 나뭇잎이 주저주저 미끄러져 내린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망설이다 점이 되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 나뭇잎 또한 점으로 변했다가 흔적도 없이 스러질 것이다. 늦가을의 정서는 적막함이 제격이다. 머지않아 잿빛 갑주 차림의 겨울 군대가 기치창검을 번뜩이며 도하(渡河)하리라. 늦가을 아파트 단지의 산책로를 걸으며 반추한다. 내가 어떤 이들에게는 소실점처럼 사라져간 대상이었고, 그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어왔으리라는 것을.
쫓기듯 걸음을 재촉한다. 산책로 끝에 이르러 두리번거린다. 헬멧을 쓰고 킥 보드를 타고 간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하고. 나를 앞질러 점이 되어 사라진 그 아이가 내가 잘 아는 아이가 아닐까 해서. 눈이 시리다. 환청인 듯 유년의 기적소리가 들린다. 엄마 치마끈을 붙잡고 역사 안으로 들어선 상고머리 아이가 기차를 타고 점이 되어 사라진다. 플랫폼에 또 다른 점이 된 엄마를 남겨둔 채.
*2020 선수필문학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