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뜰에 핀 무궁화는 / 김주선
고등학교 졸업식도 못 치르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가 있다. 곱슬머리에 주근깨가 많고 사리에 밝은 영민한 친구였다.
오 년 전이었을까. 집 근처 농장에서 무궁화(Rose of Sharon) 묘목을 샀다며 현관 출입구 왼쪽 화단에 심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잘 자랄지 걱정을 하더니 해마다 꽃나무의 성장기를 알려왔다. 작년 여름에는 백송이 넘게 피었다며 분홍색으로 활짝 핀 무궁화꽃 소식을 전했다. 한국에서 자라는 것처럼 나무가 크진 않지만, 근성이 있는 꽃나무라 낯가리지 않고 잘 자라주어 고마운 모양이었다. 매년 여름을 꽃 보는 재미로 산다며 즐거워했다.
지난 공휴일이었다. 그녀의 SNS에 새로운 글이 업로드되었다. 코로나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해 서재의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일이 일상이라는 내용이었다. 여느 때처럼 소소한 일상이려니 생각하며 열었는데 유튜브 영상 링크였다. 마음을 다스리는 음악을 검색하다 연관 검색어를 눌렀는데 애국가를 클릭하게 되었다며 오늘도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듣자는 내용이었다.
요즘은 트로트가 대세라는데 향수병을 치료하고 달래기로 하면 트로트가 훨씬 나을 텐데 뜬금없이 애국가라니.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대단한 애국자인 줄 알겠다며 나는 실소를 했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한 애국가 듣기는 가족의 점심상을 차려야 한다는 것도 잊을 만큼 묘하게 빨려들었다.
‘애국가가 다 똑같지, 다르면 그게 무슨 애국가냐?’라고 하겠지만, 달랐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그 미묘한 차이를 친구 덕분에 찾았다. 시대에 따라 특징이 있었다. 80년대는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었다면 2000년대 들어 큰 스포츠 행사 때 사용한 애국가는 장중하게 들렸다. 최근에는 경쾌하고 친근한 느낌으로 편곡되었음을 알았다. 놀라웠다. 애국가도 시대에 따라 변했음을 실감했다.
애국가 작곡의 저작권은 국가에 기증되었지만, 연주 저작권은 따로 있었다. 오케스트라 악기편성에 따라 방송사마다 음원이 달랐고 매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제공하는 영상제작물도 그랬다. 상징물인 태극기나 무궁화는 공통으로 사용되는 이미지였으나 삼천리 화려강산은 제각각이었다. 하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얼마나 많은 강산이 화려하게 변하였겠는가. 남북한 냉전 중 금기시되었던 ‘백두산’은 88올림픽 같은 큰 스포츠 행사를 치르면서 드디어 화면에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떤 방송사는 도입 부분이 역동적이고 웅장해 친구 말대로 가슴이 벅차고 떨렸다.
그래도 애국가는 애국가일 뿐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한 번씩 들으면 되지 마음을 다스리는 음악은 아니다 싶었다. 댓글을 쓰려다 말고 잠깐 손을 멈추고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계엄령 시절이었는데 매운 최루탄이 난무하던 서울에서 그것도 남산 숭의음악당에서 ‘레이프 가렛’의 내한 공연‘이 열렸다. 공연을 보기 위해 몇몇 친구들과 기차를 기다리던 6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공연티켓을 사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소녀들의 우상 테리우스가 온다는데 남산 계단에서라도 열기를 느끼고 싶은 소망 하나로 뭉쳤다. 정보를 입수한 학생지도부에서 기차역으로 학생들을 잡으러 오는 바람에 서울행이 무산되었다. 반성문을 제출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내한 가수를 못 본 것이 마치 정부 탓인 양 그녀는 친구들에게 하굣길에 있을 국민의례를 하지 말자고 선동했다.
오후 6시 국기 하강식 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차도 사람도 모두 멈추어 국기에 대해 맹세를 해야 했다. 개인의 양심에 따라 맹세 거부는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친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를 따라 ‘얼음 땡’을 풀고 학교 앞 사거리를 유유히 지나가면 저 멀리 교통경찰이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다음 날 학생지도부에 가면 영락없이 벌을 섰다.
친구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로 상이군인이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소일거리로 문구점을 하는 그녀의 어머니 일을 도왔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걸어야 하는 불편한 몸임에도 국기 하강식 때 꼿꼿이 서 있는 아버지가 너무 미웠다고 말했다. 다리 한쪽을 조국에 바치고 가족에겐 가난의 멍에를 씌웠음에도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어른이 되면 큰언니네가 사는 캐나다에 가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아마도 친구 아버지의 한쪽 다리마저 길거리에 세워두는 군사독재에 대한 항변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고 집안에서 지내다가 이십 년 전 캐나다에서 세상을 떠났다. 늦게라도 현충원에 모셔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친구는 가족 곁에 안장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여겼다.
그렇게 거부하고 듣기 싫다고 외치던 애국가가 마음을 다스리는 음악이 되고, 타국의 정원에 무궁화를 키워내는 저 열정을 나는 무어라 불러야 하나. 진딧물이 많아 이 세상에서 제일 안 예쁜 꽃이라던 그 꽃을, 매년 여름 피고 지는 꽃송이까지 세고 있을 그녀가 왜 나는 아린 걸까.
어릴 때 고국을 떠나 그곳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발전한 한국 땅은 아직 밟아보지 못한 상태로 반 캐나다인의 정서로 살았을 텐데 뭐 그리 별나게 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애국가라면 교련 시간 군사훈련 때 질리도록 들어 제일 먼저 기억에서 지웠을 법도 한데, 1절에서 4절까지 아직도 외고 있다며 자신도 놀라워했다. 체력 단련한답시고 운동장을 구르며 기합받던 일조차도 너무 그립다며 아직도 제식훈련이 있는지 묻기도 했다. 일주일에 두 번 흙먼지 이는 운동장에 모여 반드시 이수해야 했던 필수과목으로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친구는 SNS에 코로나바이러스는 꼭 나쁜 것만도 아니더란 말을 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집 안에 있는 생활이 길다 보니 잊고 지낸 소중한 옛 추억을 하나둘 찾게 되었다며, 오히려 바쁘게 살아온 자신에게 휴가를 준 기분이라 했다.
최근 한국방송공사에서 제작한 애국가 영상에 한반도 지형을 닮은 우리 고향 마을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이 나온다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부분을 눈여겨보라는 팁까지 주었다. 그 근처에 있는 파란 지붕이 자기 고향 집 같다는 소리도 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때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 딴 이후 처음으로 벅찬 가슴으로 애국가를 들었다며,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녀의 뜰에 핀 무궁화는 그리운 아버지였다. 이웃과 꽃을 이야기하며 그 꽃에 얽힌 아버지를 추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떤 경로든 유튜브를 클릭하고 애국가에 마음을 녹여 애증으로 얼룩진 젊은 날의 아버지를 가만 끌어안았을 것이다. 늦게나마 현충원에 위패라도 봉안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을 적어 코로나가 진정되면 꼭 한국을 방문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계간『시선』2022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