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1950
이 기 식(don320@naver.com)
《한국산문 2022.5 vol.193》
내 방의 창문 바로 앞이 조그마한 숲이다. 몇 종류의 나무가 있긴 하나 거의 아카시아다. 5월이 되면 창문은 탐스럽게 핀 아카시아를 잔뜩 그려놓은 액자로 착각할 정도다. 아침에 창문을 열고 볼 때마다 쑥쑥 자라는 모양이 눈에 띈다. 하얗고 탐스러운 꽃들이 향기와 함께 창문으로 고개를 드려 민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꽃송이들이 점차로 사람 얼굴로 변한다.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어릴 때, 자주 놀러 다니던 산에서 보았던 그 아카시아인지도 모르겠다. 번식력이 강해 6·25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을 살리기 위하여, 아카시아를 선택하였다고 한다. 삽시간에 전국에 퍼졌다고 하니, 그 나무의 후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6.25 한국동란이 났을 때, 우리 가족은 동대문 옆의 창신동에서 살고 있었다. 근처의 가까운 놀이터로는 동대문 뒷마당이나 낙산 밑의 커다란 공터였다. 동대문 뒷마당에는 경비행기가 뿌리는 전단이 자주 떨어졌다. 그것을 주워서 아버지한테 드리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무래도 피난을 가야 할 것 같은데”라고 어머니한테 말씀하셨다. 하늘에는 제트기나 쌍동형 수송기(B29)가 자주 떠다녔다.
아이들은 낙산 밑의 공터에 자주 모였다. 산의 앞쪽은 피부를 벗겨낸 듯한 바위들이 보인다. 채석장이라 바위를 캐낸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공터에는 커다란 쇠로 된 홈통, 대, 여섯 개가 멋대로 흐트러져 누워있다. 동네 아이들이 그 속을 들랑거리며 숨바꼭질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어느 날, 산에 있는 아카시아 꽃을 따먹으면서 산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어떤 아이가 발뒤꿈치를 높이 들고 아카시아를 따고 있었다. 보고 있는 사이, 모래흙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나뒹굴었다. 잠시 후, 소녀는 무릎에서 나는 피를 아카시아 잎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꽃이 들어있는 소쿠리를 옆에 살짝 갖다 놓았다. 무심한 듯이 나를 쳐다보고는 산의 반대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1.4후퇴가 시작되었고, 채석장은 더욱 한적해졌다. 산 위를 올려보아도 앙상한 나무만 보였다. 아버지는 혼자 충청도 강경으로 먼저 피난을 가신 뒤였다. 서울에 남아있던 가족도, 친척 몇 명과 함께, 손수레를 끌고 피난길에 나선 뒤, 보름여 만에 아버지를 만났던 기억이 생생히 난다.
아카시아 철이 되면 집사람, 그녀는 아침부터 앞의 숲으로 가서 꽃을 따온다. 나는 가시에 찔릴까 무서워 언뜻 나서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도 집 앞의 숲에 나가 한 다발의 아카시아를 능숙하게 따가지고 왔다. 꽃을 따가지고 올 때 조금 설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녀는 아카시아를 볼 때마다 개성에서 야밤에 38선을 업혀서 넘어온 기억이 난다고 했다. 곧 전쟁이 있을 것 같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아버지는 식구들을 먼저 서울로 보내고 나중에 사태를 보고 온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고생 끝에 친척 집에 와보니 빈 집이었다. 그대로 주저앉게 되었다. 낮에는 어머니와 언니들이 모두 일하러 갔다. 그녀가 5살 때였다.
혼자 집에 있는 것이 싫어 집 앞에 나와보니 앞산은 아카시아가 한창이었다. 꽃을 따 집에 가져다 놓으면 언니들이 향기가 난다고 좋아했고, 어머니도 약으로 쓸 수 있다고 했다. 그날도 소쿠리를 바닥에 놓고 조금 높은 곳의 아카시아꽃을 따려고 손을 뻗는 순간 발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무릎에서 피가 났다. 누군가 소쿠리를 옆에다 갖다주었다.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 중의 한 명인 것 같았다.
집사람은 어느새 가져온 꽃을 정리하여 벽에 거는 중이었다. “우리 이번 토요일, 오랜만에 동대문 냉면 집에 갈까? ”
몇 번 간 적이 있는 창신동 근처에 있는 식당이다. 집사람과 어릴 적 이야기를 별로 한 기억이 없다. 식사 후, 어릴 적 살던 집과 공터, 그리고 산 위까지 올라가 그때의 아카시아도 가볼 생각이다.
*본문 중의 '아카시아'의 정식 학명은 '아카시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