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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봉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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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효    
글쓴이 : 봉혜선    22-06-10 22:11    조회 : 5,567

발효

 

봉혜선

 

 식탁 옆에서 매실청이 익어간다. 기포가 전심전력으로 기어오른다. 유리병 안 매실 위에 덮어둔 설탕을 향하는 생명선을 본다. 자릴 잡고 엎드려서 본다. 며칠 새에도 진액을 다 내주었는지 작아지고 쪼그라든 매실도 있다. 한 번 오른 기포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나 보다. 기포가 하얗게 모인 모양이 흰머리를 머리에 인 노인들 같다.

 매실 한 알마다 꼭지를 따고 씨를 빼고 매실 사이에 설탕을 켜켜이 넣고 노고와 정성으로 버무린다그리고 기다림100일 동안 익혀야 하고 걸러서 또 그만큼 두어야 제 맛이 나는 매실 효소는 청 매실이 나는 5월에 담그니 그 해 겨울 무렵에나 먹을 수 있다. 빛을 발하기는 다음 해 여름이다. 탄산음료를 입에 달고 사는 막내가 더는 탄산음료를 사오지 말라고 한 말에 용기를 얻었다.

 친정아버지는 외국에 나가 있는 오빠네 식구를 위해 매실청을 매년 늘려 담그셨다. 방학이면 식구들이 있는 캐나다로 가는 교수인 아들이 무거울까 걱정하면서도 줄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친 손주 셋을 못 본지 오래 되었다. 공부하러 간다는 말에 서운해 하지도 못했고 셋 중 둘이 결혼하도록 매실 효소만 늘려 보내셨다. 매실 씨의 양 끝을 줄로 갈아 손자 베개도 만들었다는 아버지는 5월이 지나면 눈에 띠게 늙어 보였다. 우리 것은 내가 담그겠다고 했다.

 꽃을 보려 얻어다 심은 나무에 선물처럼 열리는 매화는 보기도 아까웠다. 매화 축제가 열린다는 곳의 숱한 풍경과는 전혀 다른 우리 집 매화 송이 하나하나의 선명함을 무어라 해야 좋을까. 나비 숨처럼 부는 바람에도 떨어진 꽃자리마다 맺힌 작디작은 열매가 시장에 나온 매실의 모양과 같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의 놀라움은 또 어디에 비해야 할까.

 이름을 알게 되는 나무와 채소 모종과 씨앗 봉지 사진을 믿고 심고 가꾸는 건 신이 나는 일이다. 갓난아기처럼 제 모양을 갖추고 나온 걸 보는 기쁨은 내가 세상을 창조하는 듯하고, 농사의 신이라도 된 양 득의양양하다. 그걸 직접 뿌리 내리게 하고 싹이 돋게 만든 것 같아 스스로를 위대하게 느끼게 해 주는 경험이다.

 매실은, 아니 열매들은 우리가 꽃에 취해 있을 때 시나브로 자라나와 후일을 준비한다. 저마다의 잎 모양과 잎 색을 닮은 열매들은 나뭇잎 뒤에서 살아 나온다. 꽃의 역할과 임무는 미에 있지 않다. 꽃의 강한 색과 향기는 벌과 나비를 유혹해 자손을 퍼뜨려 주기를 바라는 속임수이다. 가지고 있는 젖과 꿀을 내주고 후대를 기약 받는다. 하나의 꽃이 하나의 열매를 품는 건 당연하면서도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지. 꽃차를 덖는 한 지인은 거의 모든 꽃이 식용 가능하다고 했다. 수확은 놀람과 기쁨을 선사한다.

 말로만 들었지 경험해 보지 못하던 일이며 서툴기만 한 농사솜씨 때문인지 작게 크는 매실이 작은 채 떨어진 모습이 안타까워 보물 줍듯 가져와 보기만 했다. 노랗게 익어가는 색을 금붙이인 듯 달빛인 듯 들여다보았다. 용담리에 밭을 일군 지 10년이 되었다. 효소 담기는 밭일 중 쉬운 일에 속한다. 설탕과 담금 소주 사기에 돈이 제일 많이 든다는 말을 즐거이 하고 있다.

 처음 따다 담근 매실 외에 밭에서 난 작물이 발효를 거치면 효소가 된다. 뿌리가, 잎이, 줄기와 열매 어느 것 하나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자연이자 산물이며 효소의 재료들이다. 점점 엉겅퀴, 당귀 뿌리, 아카시 꽃, 오신채와 솔잎 효소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나는 기꺼이 효소 담는 사람이다.

 설익어 떫고 신 열매나 뿌리들이 설탕이라는 중간자를 만나 쓸모 있는 성분의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의 위대성을 새삼 느낀다. 물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고 식물에 이르러서는 꿀이 되듯 본래 가진 것이 무얼 만나느냐에 따라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어찌 매실 등에 한정되랴.

  효소의 재료에 비해 설탕이 부족하면 신맛이 나는 술맛이 된다고 한다발효 과정을 거쳐야 그 맛이 깊어지거나 높아지는 김치, 된장, 치즈, 포도주, 위스키 등을 생각한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혹은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가리키듯 그 다른 것이란 속에 감춰진 것이리라. 상대에 맞추기도 하며 자신을 벼리고 둥굴리며 더 큰 우리로 나아간다는 것이 인간된 도리가 아닌가저 할 일이라는 듯 하나의 열매에서 설탕으로, 설탕은 열매로 어우러지려 상승하고 있는 앞이다. 일어나야겠다. 깨어나고 싶다.

 

 <<양평문인 협회 양평 이야기 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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