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영어 소설책 한 권을 샀다. 전혀 모르는 작가에 딱히 읽겠다는 마음도 없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작가의 이력이 내 책장의 품격을 높여줄 것 같아서였다(외서 할인 행사 중이라 커피 한 잔 가격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책의 번역본을 선물 받은 건, 그걸 읽지도 않고 책장에 꽂으려다가 원서를 발견한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추락Disgrace』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존 맥스웰 쿳시J. M. Coetzee는 1940년 2월 9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1974년에 첫 소설 『어둠의 땅Dusklands』을 내놓은 쿳시는 두 번째 소설 『나라의 심장부에서In the heart of the country』로 남아프리카 최고의 문학상인 CNA(The Central News Agency Literary Award)를 받았다. 이후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로 남아프리카의 각종 문학상을 휩쓸면서 문단의 영향권을 넓혀갔다. 『마이클 K의 삶과 시대Life and times of Michael K』로 부커상을 수상한 그는 『추락』으로 재차 부커상을 수상함으로써 최초로 부커상 2회 수상자가 되었으며, 이후 200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 폐지 이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배경으로 흑인과 대치하는 백인의 원죄 의식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1652년 네덜란드인의 이주가 시작된 이래 350여 년 남아공의 역사에서 백인은 인종차별과 억압에 반대하는 진보적 지식인인 동시에 침략자였다. 그렇기에 쿳시의 소설들에서 백인 등장인물들의 내러티브(서사)는 자기 고백적이다. 주인공의 유화적인 행위에 담긴 기만과 위선을 폭로하고 그것이 어떻게 제국주의를 공고화하는 폭력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된다.
백인 지식인이 지닌 이중성은 작가 자신의 숙명적 딜레마이기도 한데, 그 또한 네덜란드계 아버지와 독일-폴란드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프리카너(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의 결론을 밝히기보다 관찰자의 시각을 견지한다. 경쾌하리만큼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체로, 오직 이야기를 위해 꼭 필요한 것들만을 드러내고, 드러낼 필요가 없는 대상은 절제한다. 이러한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접근방식은 냉소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흑백의 대척점에서 그 딜레마를 근원적으로 통찰하도록 독자의 사유를 이끈다.
『추락』 역시 아파르트헤이트와 그 이후라는 역사적 문제와 속죄라는 종교적 문제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루어졌다. 소설은 여성과 노화에 관한 주인공의 인식을 엿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케이프타운 출신의 백인이며 대학교수인 데이비드 루리는 성매매가 성 착취라고 생각하면서도 매주 매춘부를 찾는다. 마치 잃어가는 젊음과 활력을 그들이 채워주기라도 하는 듯이 그는 쉰둘인 자기보다 훨씬 어린 여자들과의 만남에 집착한다. 비슷한 이유로 그의 강의를 수강하는 멜라니와도 강제로 성관계를 갖는다. 이 일이 공론화되자 데이비드는 직장을 그만두고 동부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딸 루시에게로 간다.
자신을 향한 비난에 자기를 방어하기보다 반항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은 주인공을 미성숙한 인간으로까지 보이게 한다. 추락을 자초하면서까지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답답하다. 데이비드 루리라는 인물은 인종차별이 당연시되는 시대에 도시에서 성장한 백인 지식인이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후이지만, 수도는 아직 백인에게 우호적이기에 교수라는 사회적 명예를 가진 데이비드로선 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국내 사정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데도 데이비드는 변화를 거부할 뿐 아니라 삶의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성적 능력이 줄어드는 것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젊음, 활력, 평화로움, 예술적 감성, 성적 충족감. 욕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인지 그의 말과 행동은 주변 환경과 부합하지 않는다. 멜라니와의 일이 알려졌을 때 역시 피해자의 입장은 외면한 채 남녀의 사랑은 죄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고수한다.
그런 그가 여성, 성, 인종, 나이, 권력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새벽 일찍 일어나 시장에 나가 농작물을 팔고 땀 흘리며 농사짓는 루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데이비드는 생각한다. “도시 지식층인 그들 부부가 시대에 역행하는 억세고 젊은 개척자를 낳은 사실이 신기하다. 어쩌면 루시를 낳은 것은 역사의 몫일지도 모르겠다.”
시골 생활에 적응해 가던 데이비드의 일상은 흑인 강도 세 명에 의해 뒤집힌다. 딸은 그가 보는 앞에서 윤간당했으며 그 자신은 큰 화상을 입었는데도 경찰들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워즈워스나 읊조리며 성을 탐하던 백인 지식인이었던 데이비드 루리는 비로소 현실을 맞닥뜨린다. 주민의 대다수가 흑인인 그곳에서는 힘의 균형이 도시와 같지 않을뿐더러, 인종차별 금지로 인해 오히려 계급이 반전될 수 있음을, 그는 몰랐다. 아군 하나 없는 피해자 신세가 되어 “그날의 공격은 지배와 권력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는 루시의 말을 곱씹는다. 자신의 과거 행동을 돌아보며 자기를 둘러싼 개인적, 사회적 변화에 관해, 자신이 멜라니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숙고한다. 데이비드는 멜라니의 부모를 찾아가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며 사죄한다.
이 장면은 동시에 그의 위선이 표면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데이비드가 멜라니의 집을 찾아간 건 동물보호소를 운영하는 베브 쇼와 정사를 나눈 직후의 일이다. 어린 학생을 탐해서 도달한 곳은 함께 잠을 자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땅딸막하고 시끄러운 유부녀와 고양이 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동물보호소 바닥이었다. 이날을 잊지 말자는 다짐에서 그의 회한이 읽힌다. 그러나 그는 멜라니의 동생을 보며 성욕을 느끼고, 살을 부대끼던 기억에 사로잡혀 멜라니의 연극을 보러 간다. 멜라니의 남자친구를 피해 도망치듯 극장을 나와서는 거리의 매춘부를 만나 성적 욕구를 해소한다. 더 내려갈 곳 없이 추락한 지점에서조차 여성은 주인공에게 성적 착취의 대상인 것이다.
데이비드의 가면은 루시의 농장으로 돌아온 후 완전히 벗겨진다. “돼지 같은 놈! 그 말이 아직도 공중에서 울린다. 그는 그렇게 원시적인 분노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 애에게 어울리는 걸 해주고 싶다. 적당한 매타작. 그가 평생 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말이 갑자기 너무나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본때를 보여주고, 그놈에게 제 자리를 가르쳐줘라.”(p.312) 욕실 창문으로 딸을 몰래 훔쳐본 흑인 소년을 두들겨 패는 모습에서 지식인다운 품격은 찾아볼 수 없다.
『추락』은 표면적으로 사회적인 실추로 인해 불행의 길을 걷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러나 서사가 진행될수록 시골의 인종차별주의자로 변모해 가는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불행이 합당한가를 묻기보다 인간의 품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묻고 싶어진다. 주인공이 주변을 인식하고 자기 행동을 반추할수록 그의 폭력성은 실체화된다. 힘을 지닌 사람이 책무를 소홀히 한 채 당연하다는 듯 권력을 휘두를 때 그는 가해자가 된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고 나서야 비로소 부조리에 격분하고 조금이나마 피지배계층을 이해하게 되는 주인공의 변화는 책의 제목이 불명예dishonor가 아닌 Disgrace수치인 이유를 말해주는 듯하다.
불명예스러운 퇴직과 화상으로 인해 추해진 외모, 딸의 치욕 앞에서 느낀 무기력했던 처지, 혹은 어린 소년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순간. 데이비드 루리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은 언제일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기본 명제를 외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경시해 온 삶이 품위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데이비드 루리라는 개인의 문제일까? 쿳시는 품위를 지키지 못한 수치를 이야기함으로써 품위 있는 삶의 의미를 되새겨준다.
커피 한 잔 값으로 다가온 『추락』은 커피보다 진한 여운을 전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내게 미지의 국가에 불과했다. 막연하게 그곳에 사는 백인들은 드넓은 초원에서 골프나 즐기는 부르주아일 거라고 여겼다. 킴벌라이트kimberlite(다이아몬드 원석이 들어있는 초염기성 암석)라는 이름이 킴벌리Kimberly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다이아몬드 최대 생산지일 뿐이었다. 남의 탄광에서 희생된 이 땅의 선조들 이야기에 눈물 흘렸건만, 다이아몬드 채굴에 강제 동원되었을 사람들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a Diamond is Forever”라는 캐치프레이즈만 마음에 새겼다. 비싼 보석이 내게 품위를 안겨주기라도 하듯이. 입 안이 쓰다. 내 눈물은 진실하지 않았다. 콩트를 보듯 흘려들은 고통의 역사는 금세 잊었다. 애초에 깊이 새길 마음조차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귓불이 뜨거워진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 역사의 흐름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루시의 말이 비장하다. 강간자의 아기를 임신한 루시는 농장 일꾼이었던 흑인에게 제 소유의 땅을 주고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되기로 한다, 자신이 감수하는 그 치욕이 바로 남의 땅에 사는 고통과 대가라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 태어나 새로운 세상에서 자라온 루시가 세상과 타협하는 방법일 것이다. 내가 모르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지, 고민이 시작된다.
변화에 대한 데이비드의 저항감과 더불어 작품 전반에 깔린 폭력성과 여성 혐오, 인종 간 분열 등 소설 속에 비친 남아공은 어둡기만 하다. 그렇기에 작가가 남긴 여지에 희망을 두고 싶어진다. 데이비드는 루시가 삶을 지속하는 방식을 보면서 그의 어린 딸이 더 이상 그가 이래라저래라 강제할 수 없는 어른임을 인정한다. “I am giving him up.” 병든 개의 연명을 그만두자는 이 한마디는 결국 그가 이제까지의 자신을 내려놓고 인생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그가 정말로 바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어쨌든 추락으로 얻은 수치는 그가 영원히 안고 살아야 할 짐이고, 루시가 아기를 낳으면 싫어도 할아버지가 되어야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