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의 외출 2
봉혜선
남편 앞으로 택배가 왔다. 남편에게는 밖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나 보다. 밖과 소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기꺼이 섞여 지내는가 보다. 내 앞을 막아선 남편으로 인해 외부와의 소통이 막힌 나는 굴속에서 지내야 했다.
남편이 벌어오는 먹이를 아이들에게 떼어 먹이며 창도 없는 굴 생활에 나를 가두었다. 아이들에게도 작지만 맞는 굴이 필요하게 되었다. 내 자리에서 닿는 대로 손톱으로 파거나 주먹으로 두들기고 다져가며 굴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굴에서 더디지만 조금씩 자랐다. 각자의 굴에서 구멍을 뚫어 창을 내더니 창문이 몸집만해지자 내다보던 창을 문으로 만들었다.
항해사가 된 큰아들은 6개월 만에야 상선에서 내린다. 하선 휴가 두 달 동안은 24시간 내내 자유롭다. 천천히 걷기를 좋아하는 건 땅 멀미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리라. 아니면 느긋한 성격 덕이기도 한데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나 때문에 항해사라는 어렵고 집에도 잘 못 오는 직업을 택했지 하는 자책을 하곤 한다. 또 하나, 성격이 여유 있다 못해 느리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인지 알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마른 낙엽에 기름을 부어 불을 댕기고 불이 늦게 붙는다고 화를 낼만큼 급한 성격의 남편은 어린 아들의 성장 과정을 모른 채했다. ‘움직이면 쏜다.’ 식이었으니 그림자처럼 조용히, 눈에 안 띄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아이의 몸에도 배었으리라. 결혼 후 10년 넘게 남편이 집, 혹은 가정에서 한 일은 화를 낸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으니 아빠에게서 아이가 받았을 상처가 성격이 되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학에 진학할 즈음 아빠와는 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하겠다는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했고 큰아들은 그렇게 집을, 서울을 떠났다.
게을러 보이기도, 느리기도 한 성격이 아니라면 아들은 하늘과 바다 풍경뿐인 데로 항해하는 직업이 맞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 바다 한가운데서 맞닥뜨리는 풍랑이며 적도를 넘나들면서 급격한 온도 차이를 겪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멀미가 나고 감당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아빠에게서 벗어나 저랑 다니자며 요리사 자격증을 따라고 했다. ‘그러고도 싶어, 아들아.’
먹고 싶은 것도 찾아 먹으며 휴가 중인 아들이 배달되어 온 곱창에 노란 파프리카를 더해 볶아 먹으며 맛있다고 좋아한다. 식재료 조합이 이상하지만 무엇을 이해할 수 있으랴. 있는 재료만으로도 새로운 음식을 개발했다며 나를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임을 알고 있다. 아들은 진즉 배려 깊은 성인인 것을. 설거지를 마치니 햄버거를 사러 가자고 한다. 때마침 돌아온 막내가 술을 마셨는지 “형, 형” 하며 난데없이 친근한 척을 한다. 막내 학창 시절 내내 7살 차이가 나는 형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런 광경은 드물었다. 남편에게 같이 나가자고 하니 난데없는 데이트 신청에 당황하는 듯하더니 물러선다. 저녁 6시부터 외출금지, 외부와의 불통이라는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다른 광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후 6시부터, 아니 4시 반이면 시작해야 하는 외출 불가한 밤에 대해 초창기에는 반발심도 일어 거역을 위한 거역도 해보았다. 신혼 초 열쇠를 들고나가 들어오지 않은 나를 기다리며 남편은 아파트 복도에서 소주 2병을 마시고 화낼 기운마저 빠져 있었다. 나는 지은 죄를 통감하고 다시 거스르지 않았으니 도둑이 제 발 저린 달까. 제 발등을 찧은 손목을 탓한 달까. 남편이 그 날을 다시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혹 술기운에 잊힌 것은 아닐까?
아이가 생기기 전 작은방에 딸린 붙박이장 서랍을 정리하다가‘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에 그대로 두고 나간 적이 있다. 딱히 갈 곳을 잃고 돌아다니다 들어온 집에서 열린 서랍이 딱 내 현 주소라는 실감을 했다. 나의 직장, 나의 살 곳에 안착한 사건이었다. 대학 졸업 직후 결혼한 내가 집에서 전화 받는 것을 신기해하던 친구들의 “네가 왜 이 시간에 집에 있느냐?” 는 물음에 쭈뼛거리던 답도 제 자리를 찾았다.
남편이 퇴근한 후 집에 갇히기 위해서 낮에 해야 하는 모든 활동은 4시 반이면 끝이 나야 한다. 나에게서 나는 외부의 냄새를 남편은 기가 막힐 정도로 잘 맡았다. 어쩌다 한 외출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할 것은 외출 흔적 없애기다. 옷 갈아입고 화장 지우고 장 본 것 제 자리 잡아주기 등등 동시다발적인 사후 처리는 소리만이라면 아랫집에서 인터폰이 올라올 정도다.
친구 S는 결혼 10년이 지나 시어머니와 살림을 합하면서 직장을 구했다. 나갈 때마다 다시 들어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날마다 집을 정리한다고 했다. 특히 속옷이 들어 있는 서랍 등에 더 신경을 쓴다고 했다. 혹시 모를 시어머니의 수시 검문에 책잡히지 않으려는 친구를 동정했으나 친구보다 덜하지 않았다.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 온 엄마와 함께 다닌 노래교실의 강사는 엄마가 50대 때 다니던 주부학교 노래 담당이었다. 오래된 제자의 딸인 나를 이름 대신 ‘여사’로 불렀다. 회원 중 한 사람이 나와 같은 아파트 맞은편 동에 산다, 딸이 둘이고 7년 터울 지는 것도 나와 같다, 또한 나와 동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를 아이들 학교 학부모회에서 보았다고 했다. 의기투합해 같이 벨리댄스를 배우던 그 친구가 별명을 지었다며 알려 주었다. 이름 하여 ‘5m 망아지.’ 동갑을 여사라 높여 부르는 것이 낯설어 생각해 낸 것인지 망연해 하는 내게 붙인 설명은 이렇다. 자기 남편은 늦게 나가 늦게 들어오는데 맞은편에서 보니 새벽이고 오후 6시 이후 우리 집에 항상 불이 켜져 있더라는 것이다.
무엇을 같이 하든 얼른 집에 가야한다고 자리를 박차는 내게 언제까지 그럴 거냐면서 딸만 둘인 홑 며느리인 자신은 시어머니가 굿을 한다, 작은 며느리를 들인다고 해도 당당하게 산다며 이제 벗어나라고 했다. 요리, 댄스며 수영 등 쉼 없이 무언가를 하는 것 같지만 남편이 매어놓은 5m 줄 안에서만 뱅뱅 도는 나를 간파해낸 친구의 예민함에 혀를 내둘렀지만 내게 예외는 거의 없다.
“엄마, 천천히, 천천히.” 아들이 주문을 거는 듯 반복한다. 아빠가 없으니 침착하자고 한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지 살짝 취해 비틀거리며 걸음이 빠른 막내와 한껏 느리게 휴가를 즐기는 큰아들의 팔짱을 끼고 걷는 밤거리가 푸근하고 따듯하다. 10시 넘은 시간의 주문은 포장만 가능한 패스트 푸드점에 들어섰다. 할인 쿠폰을 들고 카운터로 가려는 형을 막고 자율 주문대 앞에 선 막내의 능숙한 손가락 놀림에 분업 파트를 찾던 내 카드가 자동으로 나왔다. 낯선 밤, 낯선 패스트 푸드점, 낯선 할인 쿠폰, 낯선 자율 계산대. 내게 가장 익숙하지만 쑥 커버린 아이들에 맞춰 세상이 변하고 있다. 가던 길로 걷지 말자고 양쪽에 낀 팔짱에 다시 힘을 주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발 맞춰주며 엄마의 밤 외출을 호위하는 아들들의 어깨 사이에 묻혀 보는 밤길에 장미가 흐드러져있다. 튜울립, 수선화 등 키 낮은 봄꽃들의 색이 밤에도 선명하다.
돌아온 집 앞에 아이들에게는 일상이 된 택배상자가 부려져 있다. 남편이 풀어헤친 택배 상자에서 나온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공구들을 간추려 남편 도시락 가방 옆에 놓아 주었다. 이불을 두 겹이나 말고 웅크리고 땀을 흘리며 자는 남편의 모습이 고치에 든 것 같다. 매일 아침 새벽길을 더듬어 날개를 펼쳐야 하는 숙명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모습이다. 이제야 보인다.
<<수필과 비평 202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