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혼을 명 받았습니다
봉혜선
『사랑할 때 알아야 할 59가지부터』가 시작이다.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 『사랑 제곱』 『지금· 여기· 당신』 『왼쪽으로 가는 여자*오른쪽으로 가는 여자』 『야성의 사랑학』 『러브 토크』 『사랑은 지독한 혼란』 『사랑 · 그 환상의 물매』 『사랑의 단상』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사랑은 외로운 투쟁』 『사랑할 때까지 헤어져라』 『사랑과 죽음의 유희』 ...
서가 한쪽을 그득 메운, 사랑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이 몇 권인지 모르겠다. 하나를 늘일 때마다 나는 사랑을 얼마나 열망했던 걸까. 혹은 사랑을 얼마나 알고자 했을까. 사랑 중에는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진짜라고들 하니 사랑 하고팠을 것이다. 그런 사랑이 사라진 지금은 졸혼을 꿈꾸어도 되는 때가 아닐까.
졸업 직후 결혼했으니 사랑과 결혼은 동의어다. 사랑을 어쩌지 못해 어설피 그은 팔목의 흉터는 진해지지도, 옅어지지도 않았으나. 30년은 나이 차이 나는 아들 둘을 키우느라 남편을 빼놓았으니 사랑이니 결혼의 공백기라 이름 붙여놓기로 한다. 이제야 아이들이 독립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 사리분별이 가능할 만큼 독립적이기도 한 때이다. 또한 과거는 추억으로 돌려놓고 지금 바로 여기에 집중해서 더 이상은 ‘어떠한 나’를 놓치지 말고 찾고 싶어 내면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시기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닳고 닳은 말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에 맞추어 나도 부모로 어른으로 새로 태어나고 자라야 했다. 학교를 갓 벗어난, 솜털도 채 벗어지지 않은 애어른이 무엇을 잘 할 수 있었겠는가. 나도 시간과 경험과 세상살이가 필요했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이 사라지고 서른 넘어, 마흔 넘어서도 결혼하는 작금의 시대에 비추어보면 치기어린 용감과 사랑이라는 색안경을 장착하지 않고서야 가능한 역할이 아니었다.
그동안 남편에게는 사랑이라는 너울 말고 이혼이라는 단어가 훨씬 흔했고 자주 들먹여졌다. 교육자이신 아버지가 뒤에 계셔서 그 단어는 나에게는 듣기에도 불안한 말이었다. 붉은 줄이 쳐진다는 호적도 단 한 번도 ‘가’가 없던 성적표처럼 나와는 해당이 없어야 하는 그림이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었다. 더구나 내가 하겠다고 결정한 결혼을 번복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배신이어서 도무지 그럴 수는 없었다.
멈출 듯 그칠 듯 세월이 흘렀나 보다. 어느 날 남편이 ‘졸혼’을 말했다. 웃는 얼굴이었다. 말 섞기도 곤혹스러워 하던 여느 때와 달랐다. 나름 진심을 말하는 분위기였다. 좋아하는 맛있는 먹거리도 앞에 있었다. 어긋나기에는 모든 것이 어울리지 않았다. 약간 자랑스러워하는 목소리, 벅찬 느낌이었다. 나는 그렇게 졸혼을 ‘명’ 받았다.
졸업과 연관된 자유로움을 느낄 새는 그동안 없었던 것 같다. 계속되는 진학, 진학, 그리고 곧바로 결혼이라는 시작에 맞물린 졸업의 경험 밖에 없던 내게 내려진 명으로서의 졸혼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우선 밥에서 해방되었다. 15년 간 계속했던 도시락 싸기도 그칠 수 있었다. 두 끼나 챙겨야 하는 새벽 5시 기상도 강제 해제되었다. 내 방 문을 닫고 인스턴트 제품을 물에 불려 먹고 조용히 출근하는 바람에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일어나 희미한 아침 밥상 흔적 앞에서 하릴없이 앉아 있다가 다시 들어가 잘 수도 있었다.
일어난 어떤 날 시계를 보니 7시였다가 어느 날은 9시였던 최근은 졸혼 풍경이다. 반찬거리를 장보고 장만하지 않아도 되는 오후, 퇴근길에 물어보는 내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메뉴의 매식으로 해결되는 저녁. 도시락을 씻지 않는 주방, 1년에 천 끼를 더했던 음식 수발에서의 해방. 저녁 식사 후 마트에서 사 나르던 즉석 밥을 반 년 가량 눈 감자 집에 남아 있던 쌀 걱정 때문에 떡을 했다. 그 떡을 챙겨주지도 말라한다.
졸혼하기는 마치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남편의 점심메뉴가 다양해졌다. 내가 한 음식을 어쩌면 견디고 있었던 느낌도 받았다. 나 또한 바깥 음식에 대해 돋보기를 댈 수도 있었다. 집과는 다른 빈약한 반찬, ‘집밥 전문가’ 눈에 비친 싸구려 재료, 집에서는 따라 하기 어려운 신 메뉴들, 세계 각 나라에서 모인 기상천외한 음식들, 그리고 집밥을 내세우는 음식점들. 다양한 메뉴에서 오늘의 먹거리를 골라야 하는 선택의 장애까지 나의 수고로움을 대변해주는 곳을 새삼스레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먹어야 사는 생활에서 내가 차지하던 부분에 대한 뒤늦은 자부심에 뒤이어 무한히 제공했던 노력에 대한 대가를 계산에 넣은 가격이 만만치 않음도 느꼈다.
먹거리에 국한했지만 외출하기, 늦게 들어오기, 외박하기, 그 외 청소 등 내 영역에 붙던 군소리가 현격하게 줄었다. 장보기 같은 일을 하지 않던 사람인데 걷기를 하러 나간다고 해서 두어 가지를 부탁했다. 전화를 8번이나 한 끝에 비슷하게 사온 물건을 내려놓으며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당신이 잘하지 나 원래 이런 것 잘 못하잖아.” 살림 못한다고 내쫓으려 소리를 지르던 과거여 어찌하오리까. 변심을 변명이라도 해주오.
운영하던 공장을 넘긴 시기와 맞물려 남편이 뒤늦게 다시 불붙은 나의 글쓰기 후원을 맡아준 것 또한 졸혼의 좋은 점이다. 남편은 어떤 이점을 노리고 졸혼을 명한 것일까. 졸혼을 명한 후 남편이 내게 요청할 소리 없는 강제는 무엇일까. 아직은 겁난다. 행복도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가끔 느끼는데 졸업할 만큼 학점을 다 딴 것일까. 합격자에 한해서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보고 결혼 자격 미달자일 것이라는 자격지심으로 힘들어 하던 때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도 같은데.
못 보면 죽을 것 같아 감행한 결혼이 보면서 죽을 것 같은 상태를 겪는 동안 행했던 부침의 격랑에서 이제 졸업이다. 육아니 양육과 이음동의어였던 결혼이었고 아이들을 키우며 가려졌던 결혼의 의미를 돌아보아야 하는 시기다. 부부 서로의 장단점을 새삼스레 발견하고 감싸 안고 서로를 인정하는, 틀림이 아니라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졸업 후에 더 원숙해지고 새로워지는 시작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던 학창 시절의 이름을 패러디 한, 결혼의 반대말이 아닌 졸혼은 또 다른 시작이다.
배우자(配偶者)를 상대에게 ‘배우자’로 해석하는 말이 회자되어 있다. 영어에서 ‘더 나은 반쪽(The better half)’이라고 한다는 말을 인정하려고 남편을 들여다본다. 여기까지 오려 애쓴 흔적이 각질에, 주름에, 숨소리에 그러니까 온몸에 육화된 채 아로새겨져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빛나는 졸업장’을 어디에 두어주어야 할까. 제대(除隊)라며 아들들을 내보내준 군대에서 ‘졸대’라 쓰지 않은 것은 왜일까. ‘재(除)혼’이다.
졸업의 졸자와 병졸의 졸이 같은 글자를 쓰니 졸혼이 더 전에 행해졌다면 다른 모습이었 으리라. 이미 한참 전에 안방에서 떨어져 나와 각방 살이를 선언한 나에게 거실에서 물러나는 남편의 퇴청 인사 목소리가 오늘도 컸다. 체인징 파트너. 나는 나와의 살이를 시작하련다. 이제 졸업이다. 남편도 그러는 것 같다.
<<한국산문>>5월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