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배신
김영도
dudeh16@naver.com
목련만큼 시작과 끝이 다른 꽃이 또 있을까. 곧 터질 듯이 물오른 봉오리부터 두근거림은 시작된다. 잎사귀 하나 없는 마른 가지에서 피어난 탐스러운 꽃송이는 차라리 서럽다. 누구보다 앞질러 온 봄의 전령은 달려온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진다. 순백의 눈부신 자태가 버려진 바나나 껍질처럼 누렇게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처참하게 변해버린 꽃 따위는 애초부터 제 것이 아니었다는 듯이 사정없이 떨구어내는 냉정한 나무에 배신감마저 든다.
십여 년 전부터 남편이 귀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에게 귀촌이라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일찍 대구로 나온 시아버님 덕에 시골 생활을 모르기는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방학 때 할아버지 집에서 놀던 게 전부였다.
대학 때 농촌 봉사활동을 가서 처음으로 농촌 생활을 경험했다. 새파랗게 넘실거리는 보리밭을 보고 파밭인 줄 알았다. 포도밭에 가서는 꼬불거리는 순을 모조리 따버렸다. 손이 재바르고 무지한 일꾼인 나는 곳곳에서 사고를 치고 다녔다. 농민회 아저씨한테 꿀밤을 맞으며, 농사 망치는 처자라고 지청구도 들었다. 널빤지 서너 개를 덧대어 만든 화장실에 가는 것은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국그릇에 둥둥 떠 있는 하루살이를 건져내는 일도 끔찍했다. 유난히 모기에 잘 물리는 체질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팔다리에 카라드라민 연고를 빼곡히 발라 흉측한 분홍 공주로 놀림을 받았다. 봄 여름에만 하는 봉사활동이라서 견딜 수 있었다. 귀촌은 내 삶의 일정표에 들어갈 수 없는 악몽으로 남았다.
남편은 천천히 지치지 않고 나를 설득했다. 80년대 농촌과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귀농이 아니고 귀촌이니 힘든 일은 없다. 방충망을 완벽하게 설치할 테니 벌레 걱정은 말아라. 버블 욕조가 놓인 유럽풍 화장실을 만들겠다. 초록빛 잔디 위에 벤치 그네를 설치하고 저녁놀을 바라보자. 머릿속으로 그린 전원 속 풍경화를 내보이며 꼬드겼다. 귀촌을 꿈꾸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 가을에 결혼했다. 현실적인 경제 관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어린 청춘이었다. 방 한 칸 마련해 줄 여력이 없는 시댁이었다. 고모네서 달러 빚을 내 단칸방을 얻어주었다. 둘의 수입에서 반 이상이 지출되는 이자도 우리가 감당할 몫이었다.
남편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날갯짓을 쉬지 않았다. 1초에 200번이 넘게 날갯짓하는 꿀벌처럼 한해도 쉬지 않고 일했다. 주말도 국경일도 없는 열두 시간 맞교대 노동 현장에서 십여 년을 버텼다. 주야 교대 근무로 지친 몸은 친구들과 만남보다 누울 자리를 먼저 찾았다. 아이들의 반을 기억하는 것은 고사하고 몇 학년인지도 헷갈렸다. 어울려 사는 인간다운 삶과 멀어지면서 차가 바뀌고, 집이 넓어지고, 아이들이 커갔다. 50킬로그램도 안 되는 남편의 몸은 물기를 잃은 가랑잎처럼 버석거렸다.
‘팍팍한 도시에서 가장이라는 굴레를 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웠을까.’ 남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굴레를 벗겨내고 자유로운 삶을 되돌려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는 전원주택단지도 시골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내는데 한몫했다. 강물같이 잔잔한 남편과는 달리 잉걸불 같은 나는 전원생활에 대한 불꽃을 활활 피웠다.
시간이 날 때마다 네이버 부동산을 들락거리고, 공인중개사가 운영하는 유튜브도 열심히 들여다봤다. 몇 년 전부터 전원주택단지 붐이 일어 그림 같은 집들이 도처에 넘쳐났다. 거실이 마음에 들면 욕실이 성에 안 차고, 마당이 넓으면 방이 작고 완벽한 집이 없었다. 도화지를 펼치고 살고 싶은 집을 그렸다. 주방에서 옆으로 나가는 문을 내고 또 하나의 주방을 둬야겠다. 큰 그릇을 씻을 수 있는 개수대를 넓게 만들고. 아니, 마당 수돗가에 타일을 깔아서 거기서 씻을까. 강아지 집도 만들고, 과녁판을 사서 남편의 활터도 만들어 줘야겠다. 낙서 같은 엉터리 설계도가 쌓여갔다.
남편이 활쏘기를 시작한 건 1년 전이다. 현장에서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여유시간이 생겼으나 삶은 무료했다. 함께 놀아 줄 아이들은 다 커서 독립했고, 자기 계발을 위해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권했으나 딱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우연히 국궁을 접한 후 눈이 반짝거렸다. 몸에 무리가 가지도 않고, 적당히 운동도 되면서 무엇보다 정적인 남편에게 딱 맞는 취미였다. 활과 화살을 구입하고 유튜브로 국궁 강의를 보면서 연습했다. 집 가까이 있는 대학교 축구장에서 저녁마다 활을 쐈다. 활을 쏘고 집에 들어서는 얼굴에는 땀과 함께 생기가 돌았다. 고사목이 되어가던 남편에게 이제라도 숨 쉴 일이 생긴 것에 감사했다. 집 마당에 활터를 만들어 마음껏 즐기게 하고 싶었다.
작은 텃밭에서 키운 고추, 상추, 오이를 따서 차린 밥상은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데크에 앉아서 빗소리 들으며 신혼부부처럼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있지도 않은 강아지와 손주가 마당에서 뛰어노는 장면을 상상하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한적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골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일이 벌어진 건 지난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가을의 선선함이 늦더위의 꼬리에 묻어왔다. 활터에 다녀온 남편의 종아리에 검붉은 딱지가 붙어 있었다. 전날 코로나 백신을 맞아서 샤워를 못 한 남편이 종아리가 가렵다며 긁었다. 수상한 검은 물체가 꼬물거렸다. 떼어내 자세히 들여다보니 진드기가 아닌가. 머리끝이 쭈뼛 섰다. 그 옆에 한 마리가 더 있었다. 마치 딱지인 듯 위장술이 뛰어났다. 여덟 개의 발을 종아리에 꽂고 피를 빨고 있었다. 양쪽 다리를 앞뒤로 살펴보니 철면피 같은 놈들이 다섯 마리나 되었다. 이틀 동안이나 남편의 피를 빨아먹던 끔찍한 진드기는 쉽게 죽지도 않았다. 휴지로 싸서 온 힘을 다해 눌렀는데도 여전히 꿈틀거렸다. 괘씸한 마음에 화형에 처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니 6~9월까지의 진드기는 잘못하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무서운 생명체였다.
눈 뜨자마자 병원에 갔다. 이틀 전에 백신을 맞아서 해독 주사를 맞을 수는 없다며 바르는 약을 주었다. 잠복기가 있으니 증상이 나타나면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도 덧붙였다. 일주일 동안 체온을 재며, 상처 부위를 살폈다. 자칫 남편을 황천길로 보낼 뻔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말은 옛말인가 보다. 진드기의 공포에서 벗어난 지 며칠 만에 모기에게 또 물려 왔다. 막바지 모기의 위력은 대단해서 왼쪽 팔목이 퉁퉁 부었다. 가려운 걸 넘어 아프고 열이 나서 약을 먹고 연고를 발라도 사나흘이 지나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남편이 귀촌을 진지하게 재고하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드기와 모기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풀밭에 발을 들이기 무섭다고 했다. 이어서 지금 사는 동네에 대한 찬양이 늘어졌다. 연꽃으로 가득 찬 감못이 바로 앞에 있으니 얼마나 운치가 있느냐. 새들의 지저귐으로 아침을 열고, 여름밤이면 와글거리는 개구리 소리가 정겹다. 산책길에 두꺼비를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활을 쏠 수 있는 영남대가 코앞이니 금상첨화가 아니냐.
수필 공부를 하면서 전원생활에 대한 내 바람은 찐득한 갈망이 되었다. 서울내기인 나는 할머니 무릎베개의 기억도 그럴싸한 고향의 추억도 없다. 뙤약볕 아래서 듣는 냇물의 시원한 재잘거림도 모른다. 별보다도 예쁘다는 반딧불이를 아직 못 만났다. 고향 이야기나 어릴 때의 추억담을 맛깔스럽게 펼쳐 놓은 작품을 대할 때마다 군침을 흘렸다. 느티나무 아래 정자에 누우면 글감이 저절로 떠올라 단숨에 한편의 명작을 엮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얼거리는 남편의 등 뒤로 안락한 시골집이 하나씩 무너져내렸다. 방충망이 뜯기고 욕조가 사라지고 그네가 날아갔다. 텃밭의 상추, 오이는 시들어버렸고 강아지와 손주도 먼지처럼 흩어졌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기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는 꿈도 무너졌다. 몇 년 동안 나를 구워삶던 달콤한 말이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한낱 진드기와 모기에게 명작을 빼앗기게 될 줄이야.
지난봄 뚝뚝 떨어진 목련은 거름이 된 지 한참이다. 흉한 몰골을 잊고 화사하게 되살아나는 새봄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깜부기불처럼 잦아든 남편의 불씨도 목련과 함께 되살아날까?
『산문로 7번가』 수수밭 동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