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등이 사는 나라
봉혜선
늘 서성이는 책장 앞이다. 출석부인 양 훑는다. 책등은 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눈을 마주쳐 오는 첫사랑 기운을 뿜는다. 책들은 스스로 네모에 갇혀 있되 모두 나의 초청으로 참석한 손님이자, 이제 나의 주인이 된 자들이다. 책장은 나를 만들거나 바꾸어 준 장소다. 책등의 키나 넓이는 거의 비슷하다. 펜은 칼보다 힘이 세다고 했고 책을 생활보다 가깝게 생각해 왔다.
책장은 작가별, 시·수필· 소설 등 장르별로, 독서 토론별 책으로도 분류해두었다. 같은 칸이면 색깔별로 모아두거나 키를 맞추어 놓기도 했다. 나만의 분류 방식이기도 하다. 자칫 무질서해 보이기도 한다. 분류해 놓은 것들의 대화를 들으며 대화 속으로 끼어든다.
작가별로 분류해 둔 칸에서 들리는 건 작가 나름의 주장이다. 타인에게 말 걸지 않고 자기만의 세상을 이룬, 자아를 드러내고 자아를 뛰어넘으려 하고 세상에 목소리를 낸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훑는 눈길은 오래 머문다. 슬픔을 자아내 동감하던 초창기 소설들과 여성 목소리가 높은 데도 있다. 글의 세계로 이끈 이청준 류는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던 붓을 펼치기도 전에 꺾이게도 했다. 이승우, 최윤으로 이어지는 더 용기를 북돋게도 한, 한때 탐닉했던 작가들의 이름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더듬는다. 오래 같이 있어주어 언제나 믿는다. 긴장할 것 없는 친정 같은 안온함이 감돈다.
시집 코너다. 시집은 대개 얇다. 좁은 시집의 책등은 제 이름도 온전히 주장하지 못한다. 시로 만족하지 못하고 통째로 필사하곤 한 필사 노트에는 짧은 시에 단 나의 댓글이 더 길다. 시집의 빈 곳에도 여지없이 내가 메모해 놓은 글이 꽉 들어차 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그들은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다정한 눈빛을 보낸다. 알 것 다 알고 있다는, 다정했으나 더 이상 돌보지 않아도 무방한, 첫사랑 같은, 사랑했으나 헤어진 애인 같은 애틋한, 안개빛 같은 새것이 내는 흰빛이나 바래어 노랗지도 않은 그 중간께의 색을 내고 있다.
아직 내게 선택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무엇에 이끌린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은 종합 시집이니 티저 시집이니 선집도 여럿이다. 저들끼리 대화하는 방식은 제목으로이다. 어느 책은 묻고 어느 책은 대답한다. 싯구 같은, 댓구 같은 책끼리도 모아두었다. <<시 읽기의 즐거움>>에서 환호하다가 <<시 읽기의 괴로움>>에서 좌절하기도 여러 번이다. <<그늘이 발달>>을 하는가 하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충고에서 헤매기도 한다.
독서 토론 칸은 자유분방하다. 여러 토론 모임에서 선택받아 자유 토론을 한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예를 들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존재냐 가벼움이냐에 대한 해석과 정의 내리기에서 부터, 즉, 제목부터 혼선을 안긴다. 영화화된 제목은 『프라하의 봄』 (필립 카우프만 감독)이고 『1984 동물농장』 (조지 오웰)과 같은 시대를 방증한다. 나의 주장을 펼칠 수 없이 발표자에게 쏠리며 동감했던 시간이 다시 떠온다. 비어 있던 나의 마음을 내보일 수 없던 통렬함에 다시 낡은 책등을 쓰다듬는다.
누구나 읽었을 법하지만 읽은 이가 거의 없다는 ‘고전’ 반열에 오를 법한 책이 꽂혀있는 칸이다. 대부분 두꺼운 것이 특징이다. 읽기가 고역스러워 여전히 고(苦)전인 채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다. 견고한 성처럼, 해석이 분분하며 욕도 먹었을 법하고 때로는 끌어내려졌을 때도 있던 듯 폐허처럼 낡았지만 책등을 부분 보수한 채로 건재하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이리라. 이사가 잦았다면 폐기 목록에 다만 한 줄로 남아 있을는지.
함께 구입한 것들끼리 모아둔 코너는 도서관이나 서점에서는 보지 못한 분류이나 개인 서가의 특질 상 가능한 분류이다. 정신의 방향이나 취향을 여실히 증명하는 코너다.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이 느끼는 발전과 변화에 따른 칸이다. 한 군데에도 나의 역사가 보인다.
책장 가운데에는 글쓰기 안내서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 압도적이다.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안내서를 보면 글쓰기를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구석으로 숨거나 자꾸만 무엇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그 부분이 약해서 방어 기제가 작동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쓰고 싶은 열망에 시달리니 중심부로 옮아가는 발길은 활기차다.
요리 코너와 리빙 쪽은 점점 열세다. 나이가 들어가니 인문학, 심리학, 죽음을 다룬 책이 늘어난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엄마 담당 의사가 보내준 책은 아직 펼쳐보지 못했다. 또한 권 꽂지 못한 책이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눈 머는 병이 옆 책으로 옮을까봐 따로 두었다. 책만큼 중요한 눈. 무상해진 마음으로 가난하고 편협한 책장을 훑다가 문득 책등이 사는 나라가 그리웠다. 도서관, 책등이 사는 나라, 책등만 사는 나라이다. 도서관에 사는 책은 책등이 얼굴이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한 열리지 않는다. 글자가 되고 싶은 열망에 여전히 들썩인다.
<<수필과 비평, 2024,9>>
봉혜선의 <책등이 사는 나라>
작가는 일반적으로 소재를 선정할 때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선정한
다. 소재와 작가 간의 거리가 좁을수록 소재의 가치를 제대로 음미하고
분석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소재는 희로애락의 감정
을 고스란히 불러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소재를 해석하는 지적 정서적
성과도 높아진다.
지금 봉혜선은 책장 앞에 서 있다. 책장에는 그녀가 읽었거나 앞으로
읽기 위해 간직한 책들이 나름의 분류법에 따라 단정하게 서기를 채우고
있다. 책장은 그녀에게는 부엌이나 거실보다 더 낯익고 친밀한 공간이
며 무엇보다 책은 그녀를 작가로 만들어 준 신뢰하는 동행이기도 하다.
봉혜선은 '책등이 사는 나라‘에 사는 시민이다. 그곳 시민들은 대부분
작가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다. 일반 사람들은 책을 책이라 여길 뿐, 책
등이라는 전문 용어에는 익숙하지 않다. 적어도 글을 쓰는 작가이거나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출판업자나 편집자라야 책등은 앞표지와 뒤표지
사이에 있는 면으로 책을 꽂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부분을 지칭하는
용어임을 안다.
이 수필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독서가들에게 제한된 감정을 다루는 작
품으로 톨스토이가 말한 민중적 감염력이 적다. 어쩌면 이 작품은 작가
와 문학 독자와 독서가라는 '믿을 수 있는 독자'를 위한 소수 취향 장르
로서 수필을 쓴다는 의도로부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서두에서부터 책을 자신의 "손님이면서 주인"이라고 부른다.
늘 서성이는 책장 앞이다. 출석부인 양 훑는다. 책등은 책을 펼쳐
보지 않아도 눈을 마주쳐 오는 첫사랑 기운을 뿜는다. 책들은 스스로
네모에 갇혀 있되 모두 나의 초청으로 참석한 손님이자, 이제 나의
주인이 된 자들이다.
봉혜선은 책장에 나란히 꽂힌 책등을 지켜보면서 책과 자신과의 관계
를 설정한다. 책은 그녀의 초청으로 방문한 내빈이라는 특수 관계를
맺는다. 나아가 책을 "나의 주인“이라 호칭함으로써 정신적 시종이나
부하가 된 것을 뿌듯하게 여긴다. 이것은 평등한 관계라기보다는 주종
에 가깝다. 적어도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의 귀족과 민중이라는 계층
적 차별은 아니라 할지라도 책과 그녀와의 관계는 유식함과 품위를 겸
비한 손님과 아직 문학을 배워가는 도제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책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를 외부인들에게 보여줄 필요
가 있다. 외부인들은 그녀의 서재를 찾았던 동료 작가일 수도 있고, 아
니면 초청 명단에 올리려는 잠재 독자일 수도 있다.
그녀가 책을 정리한 순서와 분류는 책등을 통해 설명된다. 책등에는
보통 저자의 책 이름과 출판사가 기재되어 책의 신분과 내용을 알려준
다. 무엇보다 책등은 책이 소속된 장르를 소개한다. 분류된 분야들은
독서와 창작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별로 분류한 칸
에서는 책마다 나름의 주장이 두드러지고 시집 코너에서는 첫사랑 같은
애틋한 감정을 느끼고, 독서토론 칸은 자유분방한 목소리가 유난스럽
고, 고전 칸은 두꺼운 클래식처럼 견고하다. 그런 비유는 책보다는 장르
에 일치한다.
책장에서 살고 있는 책들은 주로 소장자의 취향을 따른다. 봉혜선이
응대하는 책이라는 게스트도 취향과 성격에 따라 선정(초대)되었으므로
작가는 책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우아하고 명예로운 호칭을
차례차례 붙인다. 소설에게는 슬픔을 자아내는 여성의 목소리를, 시집
에게는 안갯빛 같은 흰빛과 노란색의 중간 빛 이미지를, 영화의 원작
소설에게는 통렬한 목소리를, 고전에게는 폐허가 된 성채를 닮았다는
분위기를, 그리고 글쓰기 안내서에게는 닮고 싶은 열망의 눈빛을 보낸
다. 작가가 '책등의 나라"에 사는 책에 부여하는 호칭과 인상은 따뜻하
면서도 아름답다. 책장 주인의 교양이 물씬 풍기는 말솜씨와 마음씨가
책이라는 우아한 모습과 어울린다.
책등의 나라는 마치 중세풍의 화사한 홀에서 예의바른 인사말을 건네
는 주인이 베푸는 연회를 연상시켜 준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역할과
감정에 진실하다. 이 점에서 톨스토이가 말한 감염력 조건의 일부를
충족시킨다. 무엇보다 책을 소재로 한 수필은 심리적 품격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므로 노동자들이 목로주점에서 싼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하
게 떠드는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민중을 향한 감염력보다는 교양 있는
중산층을 위한 독서회나 음악 감상회가 열리고 있는 살롱 분위기를 연
상시켜 준다. 새로운 정보와 책의 의미를 공유하는 지적 노력을 통해
그러한 취향의 확대를 기대한다. 작가는 책을 지혜와 지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눈”으로 간주하고 "책이 사는 나라'를 도서관에 비유하는 데
서 알 수 있다.
책만큼 중요한 눈. 무상해진 마음으로 가난하고 편협한 책장을
훑다가 문득 책등이 사는 나라가 그리웠다. 도서관, 책등이 사는 나
라. 책등만 사는 나라이다. 도서관에 사는 책은 책등이 얼굴이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한 열리지 않는다. 글자가 되고 싶은 열
망에 여전히 들썩인다.
작가가 독서토론회와 수필창작반에서 활동할 때마다 책등을 지켜보
며 자신의 지적 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그러기에 기회
가 있으면 책을 초청하고 기꺼이 그들의 정신적 대화를 따르려 한다.
아쉬운 점은 “책등이 사는 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이다. 책등의
나라에는 누가 살며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를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책등의 나라에는 책만 살지는 않는다. 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인쇄업자 편집자 출판업자 서점 주인들도 주민의 일원이다.
책등의 나라에서는 책만 살아간다는 생각보다는 책과 관련된 여러 직종
의 노동자들도 제 직분을 수행하며 살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필요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책을 장르별로 분류하기보다는 책이 겪었던 갖가지
애환을 숙고하고 그것에 공감을 표했으면 한다. 예를 들면 책으로 태어
나기 위해 작가와 밀당했던 남모르는 시절, 화사한 표지를 옷으로 입었
던 순간, 인쇄소 잉크 냄새에 질렸던 기간, 서점에서 구박받았던 잠복
기, 마침내 독자의 손에 쥐(어졌을)었을 때의 환희 등을 상상할 때 책등이 살아
온 실제 모습과 대화를 더욱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바닥에 깔린 감염력을 인지할 때 책등의 뜨거운 체온을 온몸으로 받아
낼 수 있지 않을까.
<책등이 사는 나라>라는 잘 선정된 착상을 제대로 살려내는 기법은
사람 관점에서 인위적으로 가른 분류보다는 책 속에 숨어있다가 터져
나오는 목소리일 것이다.
<<수필과비평 10월 호 이 달의 문제작. 박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