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이걸 왜 버려? 아무렇게나 버리지 말고 일단 잘 보관해 둬.”
분리수거를 하러 갔던 남편이 노트 몇 권을 도로 들고 들어왔다. 노트는 사십 년 이상을 책장 속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화석과도 같은 존재, 내 일기장이었다. 중학교에서 타지의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는 이 하숙과 저 자취방으로, 서울의 대학에 진학해서는 친척 집을 전전, 결혼 후에는 또 얼마나 잦은 이사를 했던가? 숱한 이동 중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내 곁에 있는 그것들. 내 어리고 젊은 날의 흔적들.
중학생 시절, 친구로부터 선물로 받은 빨간 가죽 장정의 두꺼운 일기장. 그 일기장은 앞 몇 장이 찢겨 나간 흔적이 있어, 친구가 사용하려다가 내게 준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나는 그저 뛸 듯이 기쁘기만 했다. 1970년대 중반의 지방에서 그 일기장은 나에게 문명과 서양의 냄새, 영화나 소설 속 세계를 만끽하게 해 주었다. 심지어 금빛의 잠금장치는 개인의 비밀이 허락되지 않았던 좁은 집에서 마치 문을 잠글 수 있는 내 방 하나를 대신하는 느낌이었다. 그다음 일기장은 꽃 그림이 수채화처럼 그려진 일기장. 그리고 대학교 때 사용한 검은 색 표지의 일기장.
고등학교까지의 일기장 속에는 어린 시절의 우정과 부모님에 대한 애틋함, 성적에 대한 고민이 안타까울 정도로 빼곡하다. 대학생 시절의 일기장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이성에 대한 설렘과 좌절이 때로는 반듯한, 때로는 알아보기 힘든 거친 필체로 그 시절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흔적들의 대개가 그러하듯, 지난날의 일기장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잊힌 존재로 한 공간 속에 있었다. 다른 값진 것들, 이를테면 예물로 받은 금반지, 비싸게 마련한 안경, 자동차 키 등이 얼마나 흔적도 없이 어느 날 사라지는가를 생각하면 한 번도 소중하게 생각지 않았던 것들이 이렇게 오래 남을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살다 보면 간혹 나라는 존재가 싫어지고 지난 내 흔적을 모두 지우고 새로 시작하고 싶은 때가 있다. 그리하여 숱한 과거의 내 물건들이 나에 의해 사라지고 바로 최근에는 일기장들이 그 스산한 마음의 대상이 될 뻔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기록을 중시하는 분이셨다. 말년에는 더욱 일기 쓰기에 집중하셨다. 아버지 뭘 그렇게 열심히 쓰세요? 일기 쓴다. 일기는 왜 쓰세요? 내 삶의 흔적 아니냐?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근무 중에 가끔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온다. 내가 일기장을 다 썼구나. 사무실에 남는 것 하나 가져오너라. 나는 아버지께 여분의 근무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모아서 드린다. 아버지는 그런 류의 단단하고 두꺼운 노트를 원하셨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는 글씨가 잘 쓰이지 않음을 호소하셨다. 손가락에 힘이 없다고 하시면서 잘 쓰이는 펜을 부탁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어느 날 보여 주신 아버지의 글씨는 어떤 펜에도 불구하고 제 형체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는 더욱 글쓰기를 어려워하셨고 얼마 못 가 일기 쓰기를 완전히 멈추셨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 아버지는 다발성 파킨슨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으셨고 병명에 부합이라도 하듯 곧 보행을 못하셨고 대소변을 보지 못하셨고 음식을 삼키지 못하셨고 말씀을 못하시다가 끝내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우리가 가장 난감했던 것은 당신이 당신 삶의 흔적이라고 말씀하셨던 수십 권의 일기장 처리였다. 그 많은 일기장을 모두 보관할 수도 없었고 버릴 수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흔적에서 나라는 존재의 흔적은 얼마만큼이었는지 문득 궁금하여 몇 권을 펼쳐 보았다.
아버지는 생전에 맏딸인 나를 항상 귀하게 여기시고 의지하셨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신 후에는 네가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살까?라는 말을 늘 하셨다. 그러나 일기장에 드러난 아버지의 마음은 내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남동생에게 마음이 많이 가셨을 것이다. 내가 부모님을 위해 한 90만큼의 일에 대해서는 10만큼의 감사가 있었고 동생이 한 10만큼의 일에 대해서는 90만큼의 감사와 애틋함이 있었다. 나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여전히 부모의 칭찬과 인정을 갈구하는 아이일 뿐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은 절대 아니지만 아버지의 일기장을 모두 보관할 수는 없어 거의 폐기하고 세 권만을 남겨 두었다. 그리하여 내 책장 속에, 남편에 의해 간신히 생명을 유지한 나의 일기장과 함께 나란히 꽂혀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적에 늘 어머니에게 일기를 쓰라고 권유하셨다. 그것이 어머니에게 혹시 올지 모르는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치매가 오기도 전, 지병인 암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침대를 정리하던 중, 매트리스 밑에 누워 있는 수첩 크기의 낡고 작은 노트 한 권을 발견하였다. 그 노트를 열어 보고 나는 간신히 멈추어 가던 울음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김장을 해따. 딸이 오고 사우가 와따.’
‘몸이 만이 아푸다. 약은 머긋다.’
초등학생보다 못한 글씨. 엉망인 맞춤법. 두 문장을 넘기지 못하는 하루치 일기. 학력이 높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어머니가 느꼈을 감정들. 나에게만 간간이 내비치던 학업에 대한 열등감 등이 아버지가 출타하실 때면 받아쓰기공책을 가져오시던 과거의 모습과 겹쳐지며 한동안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때 받아쓰기 연습의 대상은 젊은 어머니였다. 나는 선생의 흉내만 내면 되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어머니의 일기를 잘게 찢어 버렸다. 그 시절 어린 딸에게 한글을 배우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젊은 어머니의 자존심 – 어머니는 받아쓰기가 끝나면 늘 공책을 장롱 위에 숨기셨다. - 그리고 늙고 병든 몸을 구부려 일기장을 매트리스 아래에 숨겨 두어야 했던 어머니의 부끄러움을 나의 마음속에만 간직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흔적을 없애버렸다.
이렇게 나에게는 세 종류의 일기장이 있다. 때론 반듯하다가 때론 질풍노도의 마음을 보여 주듯 거친 필체로 써 내려간 나의 일기, 한자가 반 넘게 섞인 필체로 한결같이 유려하고 정돈된 아버지의 일기, 일기장이기를 거부하듯 보잘것없는 노트에 쓰인 단어 위주의 초라한 어머니의 일기.
어쩌면 이 세 종류의 일기장은 각자의 인생이 살아온 흔적을 그대로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하다. 나의 젊은 날은 별일 아닌 일에도 뛸 듯이 기뻤고 죽을 듯 아팠으며 하루는 희망에 빛났다가 하루는 좌절로 숨이 막혔다. 지금으로서는 모두가 사랑스럽고 그리운 흔적이다. 아버지의 흔적은 내 일기장 옆에 나란히 자리하면서, 내가 언제든 펼치면 그 굳건한 필체와 간결한 문체로 나를 지켜 주는 듯하다. 어머니의 일기장은 그 옆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가장 큰 흔적으로 남아 때론 나를 슬프게 하고, 많은 순간 그리움에 젖게 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노트라는 물리적 공간에 일기를 쓰지 않는다. 가능하면 나의 물리적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도 거의 매일 일기 형식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딘가 온전히 남아 있다. 노트가 아닌 노트북 속에, 그리고 머리 위의 구름처럼 언제나 우리 위에 떠 있다는 ‘클라우드’ 속에. 그것은 하늘 위의 진짜 구름처럼 지상 위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상태로 존재할 것이며 사라졌다가도 내가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 줄 것이다.
그런 클라우드 속에만 나는 내 흔적을 남긴다. 그리하여,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 아들이 나의 유품을 정리하는 날. 멈추어 가던 그의 눈물이 다시 터지지 않도록, 그 아이를 자꾸만 뒤돌아볼 내가 슬픔에 머뭇거리지 않도록 나는,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