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언니 떠나고 엄마와 청자와(7) 정숙이(4) 셋이서 살았다. 그리고 임신 중인 엄마이었다, 아버지에 죽인다고 총부리 대고 밤에 긴강을 건너가고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유산을 하시었다고 했다, 엄마는 딸만 여섯 낳아 쓸데없는 딸만 많다고 했다. 여섯 중에 둘을 죽고 넷만 살았는데 마지막 유산한 아이는 아들이었다고 살면서 두고두고 엄마는 말씀하시었다.
무주구천동은 인민군 점령지로 1월까지 살았다.
1951년 1월에 구천동을 수복 하려고 군인들이 처 들어 왔다. 당시 구천동에서는 인민군은 밤에 나와서 민간의 음식을 가져갔다. 낮에는 동네에는 없지만 인민군 점령 지었다..
구천동을 수복하려고 국군이 포를 쓰면서 들어오면서 처음 만난 청년에게 공비가 이곳에 있느냐 하니 없습니다. 말했다. 제일 앞장에서 사령관이 들어오는데 어디서 날아 왔는지 사령관 다리에 총을 맞았다.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 이동네 사람 다 죽여라, 하고 말했다. 그래서 온 동네 사람을 다 모여라 하여 온 동네 사람이 다 눈이 쌓인 신작로 가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앞에서는 다섯 사람이 일제히 따발총을 쏘기로 되었다.
이 때 다섯 사람이 한 번에 다 같이 쏘라고 하였는데 온 동네 사람들은 이제 죽었구나 하고 눈밭에서 벌벌 떨고 살려 달라고 울고 있었다.
그중에 군인가족과 경찰 가족은 따로 앉으라 하니 우리 엄마는 경찰 가족 사이로 몸을 동생을 밀어서 가서 앉았다고 청자가 말했다.
총을 쏘려는데 다섯 사람 중에 한사람의 총이 고장이 나서 총을 고치느라고 조금 시간이 늦어지고 그 때 사령관이 정신이 들어 깨어나서 동네 사람을 다 죽이지 말고, 그 주동자만 죽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만난 그 청년 만 죽이었다 한다. 처음 만난 청년은 모르고 그런 줄 알고 말했지 스파이나 인민군 편에 선 청년은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청자는 살려 주세요 하고 빌었다고 말했다. 엄마도 저 어린 것들 나만 죽이고 살려 주세요 했다 말했다. 그 수복에 아버지도 군인들과 같이 들어 와서 엄마와 동생들과 만나서 영동으로 같이 왔다고 했다.
전쟁은 말이 곧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