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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이 말하다    
글쓴이 : 박용호    25-09-02 21:00    조회 : 2,071

몸이 말하다

                                                                                                                  

                                                                                                                                 박용호

                                                                                                                                

 몸이 어느 날 불쑥 말을 꺼낸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주인장 머리를 믿고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 백내장 이사는 벌써 3년째 사표를 내고 싶어 하고, 전립선 부장은 잦은 소변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어. 관절염 대리와 현기증 과장, 다리 경련 씨까지... 온갖 불청객들이 몸 구석구석에서 활개치는데도 머리는 모른 척 방치하고 있단 말이야."


 노예처럼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왔던 몸이 드디어 반기를 들 기세다. 말을 제대로 하라고 튀어나와 있는 입은 면목이 없는지 꽉 다물고 몸의 눈치만 살핀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참아온 몸이 갑자기 떠들기 시작하니 머리는 복잡해져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못한 채 멍하니 있을 뿐이다.


 같은 배를 타게 된 머리와 입이 서로 몇 마디 속삭인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몸이'내 배 째라'하고 벌렁 누워 버릴지도 몰라.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아." 조심스레 몸에게 묻는다. "무엇부터,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몸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낸다. "왜 왼손 씨는 안 쓰고 오른손 씨만 혹사시키는 거야? 왼손 씨가'나도 일하고 싶다'며 매일 한숨쉬는 거 몰라? 아무 음식이나 함부로 먹고 과식은 왜 하는 거야? 위 씨가 '나는 쓰레기통이 아니다'라며 항의해도 들은 척도 안 하잖아. 거북목은 왜 치료를 안 하는 거야? 목 씨가 '나는 원래 백조 같았다'며 울고 있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돼?"


 불만이 터진 가운데 과거에 혹사당한 일까지 들추어낸다. "기억나? 관광버스에서 잠깐 눈 붙이고 시작한 야간 산행 때 다리 씨들이 얼마나 원망했는지. 양반다리에 철야 고스톱할 때는 허리 씨가'이게 고문이야, 취미야?'라며 비명을 질렀지. 과음에 인사불성이 되어 간 씨가 '나 이제 정말 못 견디겠다'며 눈물을 흘렸고, 토사곽란 속에서 위 씨와 장 씨가 '우리 그만 은퇴하자'며 농담 아닌 진담을 했던 것도 기억나지? 고속버스 승차 전 맥주 마셔서 휴게소 아닌 곳에 정차시킨 일은 또 어떻고... 방광 씨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몸이 계속해서 하소연한다. "나는 그때마다 신호를 보냈어. 하지만 넌 신호를 무시했지.  이솝우화 속 배 씨처럼'나는 일만 하고 너는 놀고먹기만 한다'고 손발이 불평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우리 상황은 더 가관이야. 배 씨가 너무 많이 먹어서 오히려 손발이 더 힘들어졌거든!"


 가만히 들어보니 할 말이 없다. 세월이 갈수록 떨어지는 신체 균형감각과 근력을 방관만 하고 보충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머리가 여러 생각을 해본다. 그제야 각성한 머리가 온 신경망을 통해 새로운 지령을 내린다. "좋아, 이제부터 왼손 씨도 짐을 들게 하고, 왼쪽 스윙도 연습하자. 한 발로 오래 서있기 훈련도 하고, 쓸데없는 뱃살 씨한테는 퇴사 통보를 내리겠어. 하루 만 보 걷기도 의무화하고."


                                           

 주변 사람들의 몸도 하나둘 고장 나고 있다. 관절 씨가 망가져 거동이 불편한 몸, 수면 씨를 잃어버린 몸, 갑상선 씨와 고지혈증 씨, 당뇨 씨가 난동을 부리는 몸, 경련 씨와 건망증 씨가 출몰하는 몸...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남의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 정말로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이 현실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머리가 몸의 반란을 가만히 되뇌인다. 권위에 도전하는 몸의 저항이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아 속으로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젊은 몸, 청춘이 그리워진다. 건강 검진 결과에 특이 사항이 없다고 하는데도 어지럼증이 있다. 몸이 주의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리라. "머리야, 이제 좀 내 말 들어줄 거야?"라며 몸이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사회생활하면서 어쩔 수 없이 마셨던 술도 조금씩 거리를 둔다. 간 씨가"고맙다, 이제야 숨을 좀 쉴 수 있겠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생활 방식에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몸의 신호체계가 무뎌지는 것을 알리는 증상은 또 있다. 배 씨가 덜 찼다고 잔뜩 먹은 후에야 과식했다는 것을 깨닫거나, 몸에 수분이 부족해도 갈증 센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물을 마시지 않는다. "우리 신호체계가 고장 났어"라며 몸의 각 부위들이 수군거린다. 몸이 더 이상 묵묵히 참지 않을 거라고 시위를 한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거라고 경고도 한다. 


 기능이 떨어진 몸의 신호 체계를 깨우기 위해 잠자던 근육들을 하나씩 불러일으킨다. 무용수의 손길처럼 공간을 품에 안듯 몸이 움직이는 영역을 넓혀본다. 손을 높이 올리고 몸을 뒤틀어보고, 나무봉을 머리 위에서 양손 간에 물 흐르듯 옮기는 동작도 해본다. "이렇게, 그래 이렇게," 몸이 속삭인다. "기억나? 예전에 너는 이런 움직임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그 감각을 다시 찾아보는 거야."


 몸에 에너지가 돌기 시작하고 몸의 각 부분이 서로 대화하기 시작한다. 심장 씨가 혈관 씨에게, 근육 씨가 신경 씨에게, 뼈 씨가 관절 씨에게 말을 건넨다. "오랜만이야, 각각 역할을 잘 해보자"라고. 마치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동창들이 다시 만나 옛 정을 나누는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노화가 기승을 부린다. 몸이 건강하게 받쳐 주어야 주위에 민폐를 덜 끼친다. 몸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오는 회한과 고독을 이기는 훈련도 조금씩 시작한다. 고정된 일상에서 벗어나 자주 다른 환경에 몸을 던져도 본다. 산길을 오르고,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흐르는 강물에 시선을 두고, 낯선 거리를 걸어도본다. 새로운 자극은 몸의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잠자던 감각을 깨운다.


 몸은 이제 주인장과 화해를 시도한다. "우리는 결국 하나야. 네가 나를 존중하면, 나도 네 뜻대로 움직여줄 거야. 네가 나에게 귀 기울이면, 나도 네 소망에 응답할 거야. 다만 치킨은... 월1회로 협상하자." 마침내 깨닫는다. 몸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삶의 가장 친밀한 동반자라는 것을. 세상을 경험하는 유일한 매개체며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는 유일한 동행자다.


 몸과 주인장이 다시 하나가 되어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삶의 온전한 리듬을 되찾는다. 몸이 전하는 지혜의 속삭임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나이를 넘어 생명의 경이로운 춤을 다시 출 수 있게 될 것이다. 간 씨도, 위 씨도, 심지어 까다로운 뱃살 씨도 모두다 함께.


*한국산문 잡지 8월호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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