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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술 삼국지    
글쓴이 : 장석창    25-09-20 09:56    조회 : 2,197

수술 삼국지



무영등 아래로 전운이 감돈다. 미동도 없는 타인의 복부는 폭풍전야의 전장을 방불케 한다. 곧 피 튀기는 교전이 일어날 조짐이다. 적막 속에서 '뛰뛰' 기계음이 울린다. 타인의 심장박동 소리다. 진군을 독려하는 북소리로 들린다. 갑옷과 장갑을 갖추고 출전 채비를 마친다.

준비 카트 위에 칼들이 도열한다. 무력시위 중이다. 전기칼은 유비의 쌍고검이다. 총사령관이자 장수로 일인이역을 한다. 하나의 칼집에 두 자루의 칼을 품은 공수 겸장이다. 절제가 공격이라면, 지혈은 수비다. 10번 칼은 관우의 청룡언월도다. 커다란 칼날을 번뜩이며 일기토(一騎討)로는 천하무적이다. 어떠한 상대든 단칼에 베어 버린다. 11번 칼은 장비의 장팔사모다. 긴 자루에 달린 칼끝이 예리하다. 적진 깊숙이 숨어있는 적 지휘부에 회심의 일격을 가한다. 조운의 애각창은 본대(本隊)에서 주력부대를 이끌기로 한다. 다른 오호대장군인 황충과 마초도 있어 든든하다. 칼은 적재적소에 정확히 써야 한다. 용병술은 군사(軍師)의 몫, 술자(術者)의 자리에 서는 순간 나는 제갈량이 된다.

‘조조를 멸해야 한다.’ 이번 전투는 타인의 심신을 어지럽히는 난세의 간웅을 처단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오랜 시간 인체의 천문지리 습득에 주력했다. 첨단 영상장비에서 얻은 사전 정보를 한 번 더 숙지하고 최상의 작전을 구상한다. 주요 전투인 만큼 장수와 한 몸 되어 참전하기로 한다.

관우에게 선봉을 맡긴다. 임무는 첫째 관문인 피부와 피하 지방을 뚫는 일이다. 쉬이 환부에 도달하는 진입로를 확보해야 한다. 공격 지점을 찾아 적토마를 타고 배회한다. 결심이 선다. 청룡언월도를 들어 올린다. 무영등 불빛을 반사한 날이 서슬 퍼렇다. 삶의 고빗사위에 서면 이러할까. ‘집중’, 다시 한번 곱씹는다. 이 순간 감정선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선이 비뚤어지면 과정이 험난해지고, 먼길을 돌아가야 한다. 추사 선생이 일필휘지로 한일(一) 자를 긋듯 일도양단한다. 방어선이 무너지며 곳곳에서 피가 분출한다. 출혈은 진군을 늦추기 위한 적의 수공이다.

유비가 쌍고검을 들고 앞장선다. 바닥이 흥건하다. 그냥 두면 수몰할지도 모른다. 총사(總師)지만 솔선수범한다. 큰 핏줄기의 근원을 찾아 쌍고검 중 수비용 칼을 휘두른다. '삐이익', 칼끝이 닿는 순간 전기 음이 울린다. 지혈되고 있다는 신호일 거다. 미세한 핏줄기는 그대로 둔다. 시야가 확보되니 켜켜이 쌓인 복부 근육층이 방패처럼 가로막고 있다. 이차 저지선이다. 이번 돌파는 완력을 앞세우면 안 된다. 전후 복구까지 고려하여 함부로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유비가 공격용 칼을 잡는다. 아군 대하듯 조심스레 헤쳐나간다. 적군이라도 헛된 희생을 줄인다. 역시 인의(仁義)의 표상답다.

장비가 나설 차례다. 장팔사모를 곧추든다. 뾰족한 창끝으로 마지막 방어벽인 복막을 열고 복강 안으로 진입한다. 목표는 조조의 본거지인 췌장이다. 후복막 깊숙이 자리한 데다 다른 장기들로 둘러싸여 있어 접근하기 힘든 천혜의 요충지다. 일명 ‘침묵의 장기’로 웬만해선 병증을 발설하지 않는다. 출정 직전에야 조조의 소재를 파악했다. 조운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진격한다. 구절양장(九折羊腸), 소장과 횡행결장을 넘어 십이지장과 담낭 사이 협곡에 집결한다. 이곳을 통과하면 총력전이 시작될 것이다. 아뿔싸 적의 매복이다. 소규모로 산재해있어 사전 영상정찰에는 감지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조조의 군세가 간에 이르렀다는 척후병의 전언이다. ‘조조가 이미 복강 대부분을 장악하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너무 늦었구나. 이제 더 이상의 군사행동은 무의미하도다. 오호통제(嗚呼痛哉)라, 목전에 적을 두고 이대로 회군이라니.’

의업이 지극한 형극의 길임을 자각한 것은 타인의 몸 안에서 치러왔던 수많은 전쟁에 대한 넋두리 때문이리라. 수수만년 동안 진화를 거듭해 현재 모습으로 완성된 전쟁터를 넘나들며 적어도 그 지형지물만은 훤히 꿰차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채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어쩌면 의술은 조물주가 구축해 놓은 어느 지고한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무이한 길이라고 기고만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참담한 자괴감의 서막이었던가. 전투를 거듭할수록 내 지식과 내공의 한계를 인식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이는 평생을 바쳐도 의학은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진리를 인정하는 자성이기도 했다.

전문의가 되고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병마는 새로운 허무함으로 나를 옥죄어 왔다. 수술실 중앙에 놓인 수술대는 경외로웠고, 다가설 때마다 몰려드는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고개를 들면 죽음의 강 저편에서 너울대는 무당의 칼 춤사위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타인의 염원을 담은 회복 기원의 푸닥거리로 보였다. 칼을 고쳐잡았다. 그럼에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이미 확정된 길을 가는 타인의 행로에 잠시 교통정리나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신의 뜻에 따라 죽음의 문턱에 도달했다면 유능한 외과 의사의 현란한 손놀림으로 이를 되돌릴 수 있을까. 어떻게 의사라는 한 인간의 칼끝에 의해 죽음으로 향하는 순류를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전장에는 늘 돌발변수가 존재했다. 어떤 때는 피의 능선을 넘느라 태반의 전력을 소모해야 했고, 어떤 때는 예기치 못한 기형적 구조물을 만나 우회로를 확보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마침내 병마를 말끔히 제압한 순간, 더할 수 없는 희열을 맛보았으며 환자의 애절한 눈물 속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감사에 겨운 보호자의 조아림을 보며 의사도 그들과 함께 환자의 쾌유를 갈망하는 동료임을 실감했다. 그러나 병귀(病鬼)는 때때로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천근만근 내 가슴을 짓눌러 놓았다. 최후 결전은 치르지도 못하고 퇴각해야 하는 이 전황. 아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의술의 한계성이여! 병술에 달통한 제갈공명이 북벌 전쟁 중, 오장원 진중에서 숨을 거두며 내렸던 회한의 철군 명령과 무엇이 다르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전역인가, 퇴역인가, 아니면 전열 재정비 후 현역 유지인가. 잠시 휴전하며 마음부터 추슬러야겠다.

⃰ 올봄에 췌장암으로 타계하신 은사를 기리며, 당시 수술상황(암 수술 중 전이가 발견되어 수술 중단)을 필자의 임상 경험을 토대로 집도의 관점에서 서술했음을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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