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빙겐에서 만난 두 영혼
-마울브론의 돌담과 네카어 강변-
국화리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에서 남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고즈넉한 도시 튀빙겐.
중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곳에는 마울브론 신학교가 있다. 12세기 수도원으로 세워졌지만 16세기부터 교육기관으로 바뀌어, 빛나는 철학자와 시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곳이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광객을 맞이한다.
수도원 교정을 걷다 보면 엄숙한 분위기와 과거의 숨결에 내 발걸음도 무거워진다. 이곳에서, 나를 문학의 숲으로 이끈 작가, 헤세의 흔들리던 소년시절을 다시 불러온다. 14세의 헤르만 헤세. 수도원의 돌담 너머로 걸어가는 그의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영혼은 방황했다.
1877년, 슈바벤의 작은 마을 칼프에서 그는 총명한 아이로 태어났다. 라틴학교를 마친 후 부모의 뜻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견한 아들은 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제의 길에 헌신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엄격한 규율과 위선에 숨이 막혔다. 자유로운 영혼인 그는 자연의 숨결과 시의 울림에 마음을 빼앗겼고, 갈등이 깊어지자 그곳을 몰래 빠져나가곤 했다.
마울브론에서의 시간은 일 년에 불과했다. 탈출 이후 짝사랑의 실연으로 자살을 시도하여 정신병원에 보내지기도 했다. 학교를 자퇴하고 세상으로 나온 그는 시계공장과 작은 책방의 점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었다. 빛바랜 책 사이를 누볐을 청년 헤세의 모습을 그려보며 나도 서가를 둘러보았다. 그곳에서 문학에 온전히 빠져 있던 그의 표정이 잔잔한 빛이 되어 다가왔다. 이 상처 깊은 청소년기의 경험은 훗날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 고스란히 담겼다. 수많은 청년기들이 그러하듯, 나의 청춘 역시 그의 성장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칼브에 있는 그의 생가는 이제 작은 박물관이 되어 먼 곳에서 온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커다란 헤세의 초상화 앞에서 해탈한 성자의 모습을 보았을까. 그에게 합장으로 마음을 모았다. 벽의 가족사진과 진열장의 낡은 펜촉들, 전시되어 있는 그의 작품집들을 보며 한동안 그 공간을 떠나지 못했다. 그 가운데 내가 읽었던 그의 책 몇 권이 영상처럼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헤세를 처음 만난 것은 『데미안』을 통해서였다. 1970년대, 유럽 문학 열풍 속에서 그 책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 역시 싱클레어처럼 '알을 깨고 나오는' 심정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자아를 찾고 삶의 의미를 묻는 긴 여정이 그때 시작되었다. 내 안에 깃든 싱클레어의 영혼과 함께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해 걸어가고 싶었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또 다른 문이 열렸다. 동양철학에 매료된 헤세의 사유는 내게 위로이자 길잡이였다. 실수와 고통조차 구도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싯다르타의 미소에서 깨달았다. 인생의 수많은 어긋남 때문에 내 삶은 실패작이라 여기며 아파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의 마지막 역작 『유리알 유희』는 내게 "버려라. 강물처럼 흘러라." 그 말을 간직만 하지 말고 직접 삶으로 살아내라고 말하는 듯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평화를 꿈꾼 그는 스위스로 귀화했다. 그는 내게 '책으로 만나는 스승'이었다. 삶이 악몽 같을지라도 결국 우리는 그것조차 사랑하게 된다는 진리를, 나는 그의 문장에서 배웠다.
헤세가 남긴 지혜의 문장들을 가슴에 품고 그의 자취가 서린 튀빙겐을 거닐었다. 이 고즈넉한 대학 도시는 헤세뿐만 아니라 또 다른 위대한 영혼의 아픔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네카어 강변에 이르자, 나는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사랑에 잠겨야 했던 한 시인의 운명과 마주했다.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 1770년 태어난 그는 마알브론 기숙학교를 마친 후 튀빙겐 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셸링, 헤겔과 함께 '튀빙겐의 삼총사'로 불렸다. 두 친구가 독일 관념철학을 이끄는 동안, 횔덜린은 시에 몰두한 미소년이었다. 횔덜린은 학창시절에도 여자들과 사랑에 빠지곤 한 사랑꾼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궁핍했던 그는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목사직을 하지 않기 위해 가정교사로 일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학생어머니와 연애를 했다.
스물여섯 무렵, 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로 일 할 때이다. 그는 제자의 어머니인 유부녀 주제테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은행가였던 남편은 집을 자주 비었고 그들은 사랑을 나누었다. 몰래하는 사랑이 오래 갈 수가 있을까. 그는 그 집을 떠나야 했지만, 그녀와의 밀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랑이 절실하고 고통스러웠을까, 주제테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횔덜린 또한 확실하지 않으나 그 시점부터 정신이 붕괴되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그는 서른여섯 살이 되었고, 의사는 그에게 남은 시간은 3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정신이 온전한 날에만 간간이 시를 쓸 수 있었다. 그는 네카어 강의 흐르는 물결을 좋아했다. 그의 애독자였던 네카어 강변에 사는 수도원 목수가 그를 자신이 돌보겠다고 의사의 허락을 받았다. 그의 가족은 정성스럽게 환자를 돌보았다. 시인은 아름다운 쉼터에서 가족이 생긴 것이다. 그는 칠순이 넘어 세상을 뜰 때까지 그곳에서 살며 시를 썼다.
네카어 강변의 노란집 뾰족탑, 그가 살던 2층 방은 지금은 그의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작은 방에는 빈 의자만 남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사랑의 고통으로 한 여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시인은 그 아픔 속에서 반생을 보냈다. 참으로 비운의 연인이었다. 세상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많다. 진정한 사랑은 어쩌면, 이룰 수 없을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보이는 것일까.
우리는 강 건너편에서 한참 동안 기념관으로 보존된 그 노란 집을 바라보았다. 그의 사랑은 시가 되어 우리 곁에 머문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시구가 새겨져 있다.
"폭풍 중 가장 성스러운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 벽 무너져 내리기를.
또한 내 영혼 한층 찬란하게/ 그리고 한층 자유롭게
미지의 세계로 물결쳐 가기를!"— 「운명」 중에서
헤세와 횔덜린. 한 사람은 규율과 위선에 맞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으며 영혼을 흔드는 여러 편의 소설로 마침내 도달할 인간의 길을 열어 보였다.
다른 한 사람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 시가 되었다.
마울브론의 돌담과 네카어 강변의 노란 집은 그들의 고뇌를 증명하듯 서 있었다. 그들의 삶이 내게 보여준 것은, 상처와 어긋남조차 삶의 일부이며 그 고통을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한 뼘 더 성장하고 마침내 강물처럼 흘러갈 수 있다는 진리였다.
여행을 통해 책속의 스승들을 직접 만나고, 내 삶의 다음 페이지를 쓸 용기를 얻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