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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팬 레터    
글쓴이 : 곽지원    25-10-25 13:21    조회 : 109

어느 팬 레터

 

곽지원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학교로 편지 하나가 배달되었다. 학교로 편지를 보낼 사람이 없는데? 묘한 기분으로 봉투를 뜯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놀랍게도 팬 레터였다.

 

한 달 전, 교내 문예 창작대회 단편소설 부문에서 상을 탔다. 당선작은 학교 신문에 실렸고,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편집장이 되어 직접 만든 신문에 소설이 몇 페이지에 걸쳐 실리니 쑥스러웠지만, 뿌듯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처음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은 순간이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인근의 다른 여고 학생이었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통해 우연히 나의 글을 보게 되었고, 깊은 공감대를 느껴 편지를 쓴다고 했다. 생전 처음 받은 팬 레터에 당황했지만, 힘도 얻었다.

 

고등학교 동창들을 졸업 후 28년 만에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그 이후로도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너 글 잘 썼잖아! 왜 소설가가 안 된 거야?”. 그 말은 양날의 검이다. 나의 부족한 재능과 게으름을 깨닫는 자극이기도 하지만, 나름 반짝였던 학창 시절을 추억하게도 된다. 추억의 끄트머리에 그 팬 레터가 있다.

 

그녀와 나는 고3이 되기 전까지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로 가까운 학교에 다니면서, 왜 직접 만날 생각은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 고3은 모든 일상을 멈추고, 공부만 해야 했나 보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그냥 그래야 도리인 줄 알았으리라. 물론 아빠의 부도로 갑자기 온 가족이 흩어져 몇 달간 남의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펜팔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간 그녀의 이름을, 상상도 못 한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쳤다. 86년도 학력고사에서 있었던 두 가지 큰 변화 중 하나가, 원서를 낸 학교에 가서 치러야 하는 논술고사였다. 지금처럼 논술학원도 없었고, 과외 금지 시절에 무슨 논술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황당한 입시였다.

 

철학과에 지원한 학생들끼리, 여러 교실에 나누어서 자리가 배정되었다. 원서를 낸 순서대로, 나는 창가에 있는 4번 자리에 앉았다. 논술고사가 시작되기 전 주변을 둘러보는 와중에, 내 옆줄 앞쪽 자리 책상에 붙어있는 이름이 눈길을 붙잡았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기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틀림없다는 예감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논술 주제와 시험지를 받고, 무슨 정신으로 글을 썼는지 모르겠다. 내 눈길은 자꾸 그녀의 뒤통수와 이름으로 향했다. 펜팔 중에 무슨 공부를 하고 싶다거나 어느 대학이 목표라는 얘기는 서로 하지 않았다. 그저 문학 얘기, 음악 얘기, 그런 소녀스러운얘기들만 주고받았다. 그녀와 내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원서를 내고, 또 둘 다 합격할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만약 합격해서 같이 다니게 된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정신 차리자, 집중하자, 계속 스스로를 다그치며 글을 썼다. 이미 체력장에서 4점이나 깎였기 때문에, 논술 점수가 중요했다.

 

고사장을 빠져나오기 전에,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머뭇거렸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내 정체를 밝힐지 아니면 모른 척하고 나올지. 만약 둘 중 한 명만 합격한다면, 그렇게 나누는 인사가 독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뒤통수만 보이던 그녀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고,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 나야, **.”

, 그녀도 내 이름을 봤나 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안녕.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은진짜 몰랐어.”

그러게 말이야. 우리는 역시 통하는 데가 있나 봐? ㅎㅎㅎ

깜짝 놀랐어, 네 이름 보고.”

나도 아까 화장실 가기 전에 네 이름 봤거든. 이 세상에 곽지원이란 이름이 또 있겠어? ㅎㅎㅎ.”

 

처음 얼굴을 마주한 우리는 편지를 쓸 때와는 달리 어색하게 대화를 마쳤고, 그렇게 헤어졌다. 다행히 둘 다 합격해서 몇 달 후 학교에서 재회했지만,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우리는 베프가 되지 않았다.

마치 달과 지구처럼, 우리 사이에는 늘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무엇이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았을까?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첫 번째 팬이었던 그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다시 만난다면, 감사의 인사로 근사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


*이 글은 <제7회 한국산문이사회 수필 79선>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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