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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두 가지 태도_8주차 (소설반)    
글쓴이 : 김성은    22-05-06 08:41    조회 : 1,660


5월 첫 주 강의에는 처음으로 네 분이나 결석하셨습니다. 오미크론에 걸려 수업에 참석 못 하는 분들이 안타까움을 알려오셨어요. 얼른 쾌차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뵙길 바랍니다.

8주차 수업에서는 소설 문장론의 기본인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서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를 살펴보았습니다.  

1. 잘 보아야 한다.

여인의 고개 숙인 모습에서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고, 턱을 괸 모습에서 그녀가 원망하고 있음을 보고, 혼자 서 있는 모습에서 그녀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고, 눈썹을 찡그린 모습에서 그녀가 수심에 차 있음을 보고,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파초 잎사귀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녀가 재(齋)를 올리는 중처럼 가만히 서 있지 않고 진흙 소상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지 않는다고 책망한다면 이는 양귀비에게 치통을 앓는다고 꾸짖고 전국시대의 미인 번희(樊姬)에게 쪽을 찌지 말라고 금하는 꼴이며, 미인의 맵시 있는 걸음걸이를 요망하다고 나무라고 춤추는 자태를 경망하다고 질책하는 격이다. (연암 박지원)

 작가님은 박지원의 문장론이라 할 수 있는 글을 인용하며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세가 매력적이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관습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 진짜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거기의 의거해서 무언가를 묘사해선 안 된다고요. 글로 쓰고자 하는 대상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보고 직접 내가 본 것만을 써야 한답니다.

흔히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보는 만큼 아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대상을 진짜로 보고 있느냐. 이미 기성의 지식으로 전달되어 왔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그걸 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이 앎을 바탕으로 안다고 한다면 애초에 나라는 사람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뭔가 알 수 있으려면 결국 내가 봐야 합니다. 내가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우리는 보통 내 감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 표현할 수 없겠다 싶으면 100% 일치하지 않는데도 관습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내 모든 것을 의탁해버리거나 위임해버립니다. 우리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싶어 하는 것 너머에 있는 좀 더 굳건하고 본질적이라 여겨지는 정서를 잡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답니다. 자기가 보고 느낀 걸 가지고 쓰려고 해야만 자기 언어를 가질 수 있다고요.  

2. 잘 들어야 한다. 

이문구 선생은 어느 산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낙향해 살던 선생은 어느 날 시내로 장을 보러 나갔다가 맘에 쏙 드는 생선을 보았으나 혼자서 사먹기에는 분에 넘치는 반찬거리인지라 값도 묻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한 노부인이 생선장수 함지박 앞에 서더니 다짜고짜 넙치를 손에 들고 ‘월매나 헌댜?’라고 물었다. 생선장수는 만 원은 받아야 하지만 마수걸이니 팔천 원만 달라고 했다. 노부인은 넙치를 던지듯이 놓으면서 ‘팔천 원이라고 이름 붙였남’ 하고 불퉁거렸다. 그때부터 생선장수와 노부인 사이에 흥정이 시작되는 거였다. 소설가 한창훈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고추를 좀 사려고 여수항 근처를 기웃거리던 그는 때깔 좋은 고추를 늘어놓은 노점상을 발견하곤 주인사내에게 얼마냐고 물었다. 그해 고추 작황이 좋지 않아 웬만하지는 않으리라 짐작은 했으나 듣기에 귀가 아플 만큼 비쌌던지라 그도 고춧값이 뭐이리 비싸냐고 투덜댔다. 그 말에 주인사내는 기분이 좋다 나쁘다 식의 말 대신 ‘그러게 말이오. 사람 고춧값은 싸디 싼디’라고 하는 거였다. 주인사내의 신세한탄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고추를 두어 근쯤 팔아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인정일 테다. 그 소설가들의 문장이 일상에서 길어올린 평범한 언어임에도 싱싱하고 눈부실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이들이 남의 말에 무심하기는커녕 외려 사소한 한마디에 담긴 진정을 헤아릴 줄 알았기 때문이리라. _ 손홍규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말에는 말의 법이 있고 글에는 글의 법이 있습니다. 흔히들 말을 잘하면 글을 잘 쓴다고도 하지만 말을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닙니다. 잘 듣는 사람이냐 잘 듣지 않는 사람이냐에 관건이 달려있습니다.

귀에 들리는 어떤 소리, 이야기들을 무심코 넘기지 않고 귀를 기울이고 기울일 때 남에게 들려줄 이야기들도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설가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요. 그런 사람만이 좋은 문장을 쓸 자격이 있다고 합니다. 작가님은 자신이 글을 만족스럽게 쓰지 못하면 기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태도가 성실하지 못해서라고 스스로 반성하면서 항상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이 세상에 더 열린 귀를 가지고 어떤 소리도 허투루 흘려듣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답니다.

듣는다는 것은 문장론의 기본입니다. 자기 목소리를 듣는 것, 자기 내면에서 울림을 감지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_발터 벤야민『사유이미지』  

작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읽어주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자도 있습니다. 글 쓰는 이가 대충 썼는데도 독자들에게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고 뭔가 대단한 무엇인가로 여겨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선 안 된다고요. 글이 작가를 절대로 넘어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정으로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그만큼 작가가 뛰어나야 한다고요. 작가로서 뛰어나기 위해서는 아는 만큼 보려 하지 않고 보는 만큼 알려고 해야겠지요. 말하려 하지 않고 들으려고 하는 자가 진정한 소설가랍니다.

결론적으로 쓰고 있는 글에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 이상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해선 안 되고, 비록 마음에 안 들어 서운하기도 하고 부족하다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내가 표현하거나 말하고 싶은 걸 정확하게 문장으로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요. 정확하게 문장을 쓰는 사람이야말로 실제로 좋은 문장을 쓰게 된답니다.

이상입니다. 

 


노정애   22-05-06 19:44
    
성은샘
이곳에서 보니 넘 반갑습니다.
소설반이 계속 이어져서 참 좋습니다.
후기만 읽어도 반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무엇을 공부하는지 알 수 있을것 같아요.
건강하게 잘 지내셔서 가을학기에는 금요반에서도 뵈어요.
     
김성은   22-05-07 08:29
    
노정애 반장님, 반갑습니다. 한국산문의 도움과 여러 선생님들의 관심에 힘입어 소설반이 무사히 운영되고 있어요. 너무도 감사한 일이지요. 여름학기 쉰다고 들었는데 반장님도 긴 휴가를 알차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