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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7강 마르틴 루터 킹과 흑인 민권운동(평론반 미국 문학 기행 최종)    
글쓴이 : 김숙    22-07-12 23:56    조회 : 4,051

37강 마르틴 루터 킹과 흑인 민권운동

 미국 문학 기행 강의 마지막 강의였다. 다음 주부터는 중국 문학 기행을 시작할 예정이다.

1. 마르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 1929.1.15. - 1968.4.4.)

미국의 비폭력주의 흑인민권운동가. 침례교회 목사.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미국에서는 킹 목사를 기려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날(Martin Luther King, Jr. Day)로 정했다. 연방 공휴일로 지정함.

2. 내겐 꿈이 있어요. (I Have a Dream)

워싱턴 대행진에서 킹이 남긴 명연설이다.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Washington March for Jos & Freedom, 1963.8.28)6월에 존 F.케네디 대통령이 제안한 민권법에 대한 대중 지지를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킹은 워싱턴DC 링컨기념관 계단에서 운집한 25만 명의 시위자들에게 17분간에 걸쳐 연설했다. 이 연설에서 킹은 시민권 운동의 열망을 표현했으며 구약성서와 미국적 신념의 실현되지 않은 약속을 상기시켰다. 1863년의 노예 해방 선언을 언급하면서 “10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은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외쳤다. 이 연설은 1999년 대중 연설 학자 설문 조사에서 20세기 최고의 미국 연설로 뽑혔다.

3. 출생과 성장 과정

마르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 1929.1.15.-1968.4.4.)는 침례교 목사(마이클 루터 킹, Michael king)3남매 중 둘째로 출생했다. 본명은 아버지와 같은 Michael king이었다. 5Baptist World Alliance Congress in Berlin(1934) 참석했던 아버지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존경하는 뜻에서 자신과 아들을 개명하였다. 마르틴 루터를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느껴 결정했다.

킹은 12살 때 백인 친구를 못 만나게 하는 분리주의에 절망하여 2층 창밖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3세 때 신학을 전공하기로 각오했는데 글쓰기와 웅변에 탁월하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버스에서 기사 명령에 불복종하는 등 인권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목사가 되고 싶었던 것도 인권운동을 하기에 목사가 제일 좋겠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애틀란타 남자 대학인 모어하우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1948년에 졸업했다. 청년 시절에는 H.D. 소로의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 사상에 경도되기도 했다.

 4. 결혼과 목회자 시기

크로저 신학원 재학 중 독일계 백인 여성이 첫사랑 애인이 있었는데 흑인 목사의 부인은 흑인이어야 한다는 충고 때문에 포기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결국 코레타 스코느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남편과 함께 맹활약 했으며 킹 사후에도 유지를 이어갔다. 슬하에는 22녀가 있었다. 그중 차남과 차녀는 둘 다 목사이면서 민권운동가였다.

 5. 민권운동가 변신

초기 신앙의 핵심은 완전한 자기희생만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했다. 초기에는 근본주의 신학 중심이었다. (마태5: 38-42)

1955(26), 보스톤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을 때는 근본주의 신학이 달라졌다. 20세기 신학의 혁명을 일으킨 폴 틸리히 쪽으로 향한다. 폴 틸리히는 독일 사람으로 유럽 최고의 석학이며 신학자였다. 그는 히틀러에게 최초로 탄압받았다. 신학 자체가 인도주의적 진보주의였다.

킹은 이 무렵 보좌관 러스틴을 통해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사상에 접근하고 좋아한다. 신앙이 바뀌면서 철학도 바뀌는 계기가 된다. 또 하워드 툴만 교수의 저서를 통해 간디 사상에 접근하고 간디의 감동을 찾아 인도 여행했으며 톨스토이 사상에도 심취한다. 간디를 보고 와서는 여러 단체와 연대한다. 모든 운동 현장을 찾아다닌다.

몽코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 이후 미국 민권운동의 뿌리가 되다.

남부지역, 짐 크로우법(The Jim Crow laws, 인종 분리주의 정책법1890-1965년까지 시행)

1955(26),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Montgomery Bus Boycott) 사건이 일어났다. 32, 16세 여학생 콜빈(Claudette Colvin), 15)이 흑인용 좌석에 앉으려는 백인에게 양보를 거부하여 피체 된다. 킹 목사 등은 그녀가 임신했기에 대중적인 저항의 표본으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 마침 121 일자로 사건 발생. 1961(32) 올바니 운동에서 피체 되었다.

그 후 한 지역의 불의는 전 세계의 정의에 대한 위협이며 자유는 고통스러운 투쟁을 통해 얻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버밍엄 감옥으로부터의 편지

킹은 남부그리스도교도 지도자회의(SCLC)인 비폭력 온건 흑인 민권운동을 주도한다. 미국 전 시민을 향한 경고였고 단체가 커졌다. 워싱턴 대행진을 거행했는데 이 덕분에 FBI 후버 국장으로부터 감시받음.

1963.11.22. 케네디가 46세로 피격당해 사망했다. 케네디 저격 후 킹은 아내에게 자신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예견하기도 함.

1964(35), 1014,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상금은 모두 민권운동에 기부했다.

노벨상 수상 발표로 가장 격노한 건 FBI 후버 국장이었다. 언론에 킹목사의 비리를 폭로했으나 아무도 노출 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후버가 맹비난을 받았다.

킹은 베트남 반전운동을 전개했는데 명분은 베트남의 베트남인화를 주장했다.

1965(36)3, 셀마-몽고메리 행진(Selma to Montgomery marches)은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1966(37), 시카고 자유 운동(The Chicago Freedom Movement)은  도시의 주택, 교육, 교통, 직업, 노동, 건강 등 삶의 질 개선 운동을 했다.

1968(39), The Poor People's Campaign. 킹 등이 중심, 경제정의 실현 운동을 전개했다.

6. 마지막 여로

1968. 329,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파업(312일부터 파업 개시) 중인 노동자 지원을 위해 멤피스(Memphis, Tennessee)로 가서 그들과 함께 모텔에 합숙했다. 이미 그를 암살하려는 인종 차별주의자의 파견설이 파다한 가운데, 피신하라는 충고에는 누구나 오래 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 싶다.” 

1968.4.4. 오후 61, 모텔 2층 발코니에 서 있던 킹은 피격당했다.

합평

조진아 / 김명희 / 오길순

한국산문 7월호 합평 작품 읽기

곽미옥 / 신현순 / 이영옥 / 김낙효 / 설영신


곽미옥   22-07-13 09:21
    
김숙 선생님~ 후기 쓰시느라 애쓰셨어요..감사드려요.
    인종 차별을 위해 헌신한 킹의 삶은 미국 국민들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주었겠지요?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멋진 말이지요?
    어제  어느 기사에서 이집트에서 온 난민들이 한 말이 생각나네요. 한국은  세계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없는 나라이기에
    가족과 함께 왔다고요~ 이 말도 참 멋지지요?
    우리나라  국민들도 멋지고요~ 평론반 선생님들도 멋지셔요!!
김숙   22-07-13 11:13
    
곽미옥 총무 님
댓글 감사합니다.
강의 내용에 비해 항상 부족한 후기를 올려서 기 떨어지는데 총무님의 격려와 댓글 위로가 됩니다.
6월에 통 수업도 못 듣고 후기방에도 참석 못해서 그새 서먹했는데 총무님 댓글 보면서
"나에게도 꿈이 있다?"라고 힘 내봅니다.^^
박진희   22-07-14 01:35
    
'I have a dream.' 지금도 힘과 원동력을 주는 역사적인 명연설을 함께 합니다.
 "나의 벗들이여, 어제와 오늘 우리가 고난과 마주할 지라도, 나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 내린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에,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는 저 미시시피주 마저도,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김숙   22-07-15 14:07
    
박진희 선생님, 댓글 고맙습니다.
연설문을 적었다가 양이 많아 지웠는데
선생님께서 똭 올려주셨네요.
후기가 댓글로 완성되었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하광호   22-07-18 08:31
    
김숙 선생님 후기 글을 읽다 보니 교수님의 멋진 강의  내용이 떠오릅니다. 요약 정리가 잘 되어 읽고 갑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배워가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항상 꿈이 있지요.  새롭게 다가오네요.  감사합니다.
김숙   22-07-19 09:02
    
하광호 선생님
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글쓰기에 도움이  되면 더욱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