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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의 추억    
글쓴이 : 장석창    24-11-10 10:01    조회 : 1,095

막걸리의 추억



일찍 잠에서 깬다. 좀 더 자보려고 뒤척이다 산책에 나선다. 집 주변 수영강 유람선 선착장에 멈춰 선다. 동지로 다가서는 늦가을 밤하늘의 어둠은 넓고도 두텁다. 강 건너 가로등 불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얄랑인다. 고흐가 아를의 밤하늘에 매료되어 그렸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의 전경과 흡사하다. 깊고 푸른 밤, 별을 따라가다 북두칠성을 발견하고 환호한다.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진 국자 모양 별자리, 지금 그 안에는 무엇이 그득 담겨 있을까?

고적할 때 별을 본다. 총망한 도시에 야음이 내리고 지친 심신이 그 적막함에 빠져들 때면 별은 점점이 드러난다.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은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항성(恒星)이다. 촘촘히 보이는 별들도 실제 거리는 천문학적이다. 별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사람들은 무리로서 별을 논한다. 별은 외롭지 않다.

나는 경남 함양의 명예군민이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속한 한국헬프클럽은 매년 11월이 되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주민을 상대로 의료봉사를 했다. 이를 인연으로 우리 단체와 강청마을은 자매결연을 하였고, 당시 군수의 주관으로 모든 회원에게 명예군민증이 발급되었다. 나는 소속 회원들과 함께 2004년 11월 7일에 있었던 수여식을 겸한 봉사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지리산 자락 강청마을로 떠났다.

만추의 지리산 밤하늘은 명징했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롱초롱 별빛이 도심에서 보는 것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지척에 있는 듯 따스했다. 인공조명이 아닌 자연의 빛이다. 응시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영롱함에 안구가 편안했다. 콧속에 스며드는 공기는 신선했고, 백무동 계곡 물소리는 옥구슬이 구르는 듯 귀를 정화했다. ‘아아! 여기가 민족의 영산(靈山) 지리산이구나.’ 나는 윤동주 시인이 별을 헤듯, 별 하나에 마음속 품은 낱말을 붙여나갔다. ‘사랑, 기쁨, 설렘…’ 한 단어에 이르러 숨을 골랐다. 그리고 되뇌었다. ‘정(情)’

마을회관에는 주민들의 정성 어린 저녁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리산 흑돼지 수육과 산 더덕 같은 특산물 요리에 집에서 담근 막걸리가 곁들여진 시골 밥상이었다. 한 사발 가득 막걸리를 부었다. 술 익은 냄새가 풍겨 나왔다. 주민들과 서먹하던 장벽은 이내 허물어지고 어느새 우리는 벗이 되었다.

막걸리는 정이 담긴 술이다. 그 향은 은근하고 맛은 구수하다. 막걸리는 넘길 때 인후를 자극하지 않는다. 합석하는 사람들 관계는 수평적이다. 서로를 깔보지 않고, 올려보지도 않는다. 여기에 돌올함은 없다. 정갈한 주점에 홀로 앉아 윤이 나는 그릇에 마시는 막걸리는 왠지 어색하다. 아낙네가 새참으로 찌그러진 놋 주전자에 담아와, 모여 앉은 농부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막걸리. 흙 묻은 손을 풀잎에 대충 문질러 닦고, 커다란 사발에 가득 부어 양손으로 모아 쥐고, 목젖이 불룩불룩하게 단숨에 들이켜고는, 입 주변을 소매 끝으로 한번 훔쳐내고, “어허, 시원하다” 추임새 후, 풋고추를 막장에 찍어 우적우적 씹는 것이 그 참맛이다. 지리산 밤의 정취에 취하고, 함께 온 이들의 우정에 취하고, 마을 사람들의 인정에 취했던 나는 마지막으로 막걸리에 취하고 싶었다. 쭉 한 사발을 비웠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 후로는 술이 술을 부르고 막걸리가 나를 마셔버렸다.

밤새 토역질한 나는 아침에는 완전히 탈진했다. 속이 울렁거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명예군민증 수여식 참여는 물론 진료까지 포기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을회관에 혼자 누워 있는데 갈증이 몰려왔다. 이리저리 살피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투명한 액체가 담긴 큰 페트병이 있었다. 사막을 헤매다 발견한 오아시스였다. 아무 생각 없이 벌꺽벌꺽 마셨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점막을 찌르는 자극이 강렬했다. ‘아뿔싸, 소주구나!’ 온몸에 취기가 남아있던 내 코와 혀는 소주의 향과 맛을 금방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소주는 이미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내려간 상태였다. 그리하여 나는 알코올에 의해 두 번 저격당했다.

“장 원장. 어른들께 드려야 할 포도당 수액을 당신이 맞네.”

내가 계속 나타나지 않자 의사 회원 한 분이 내 팔에 수액을 놓아주었다. 숙취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떨어지는 수액 방울을 바라보며 지난 의료봉사 현장을 회상해보았다. 찾아온 이 대부분은 연만한 노인이었다.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마을에는 노인들만 모여 살았다. 사실 진료라고 할 수도 없었다. 노인들이 호소하는 증상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간단한 약을 며칠 분 조제해주는 정도였다. 노인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수액 정맥 주사였다. 포도당 수액에 삐콤헥사 주사액을 섞자 보기 좋은 노란 빛을 띠었다. 값비싼 영양 수액처럼 보였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옆 마을 노인들까지 모여들었다. 침대가 없어 바닥에 돗자리를 깔았다. 기둥 사이에 빨랫줄을 연결하여 수액 걸이로 삼았다. 줄에 매달린 수십 개의 노란 수액은 넝쿨에 주렁주렁 열린 참외 같았고, 그 밑에 누워 수액을 맞는 노인들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포도당 수액은 노인들에게 만병통치약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치료제 투약을 위한 정맥 확보의 교두보일 뿐 약리 효과는 미미하다. 주사 한 대 맞고 싶어도 차로 삼십 분은 나가야 한다는 노인들, 모두 앓던 이가 빠진 듯 즐거워했다. 그들에게 늙음의 초라함은 없었다. 아이의 천진함뿐이었다. 진료는 나에게는 일상이지만 의료봉사는 업으로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어쩌면 봉사는 나를 위한 일인지도 모른다. 베푼 것보다 더 큰 자기만족이 있기 때문이다.

주사를 놓으며 노인들의 주름투성이 얼굴을 살폈다. 주름은 삶의 기록이며 표정을 지을 때 도드라진다. 내가 주삿바늘로 물으면 그들은 주름의 움직임으로 응답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와 내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인생 역정을 순화했고, 기쁨이라는 이름으로 이 순간을 충만하게 했고, 설렘이라는 이름으로 다음을 기약하게 했다. '싼 게 비지떡'이 항상 옳은 말은 아니다. 막걸리와 포도당 수액, 절댓값이 낮은 두 유형의 물질은 몸 안에서 바로 분해되어 소멸하지만, 무형의 존재로 남아 영원하다. ‘정(情)’은 값어치를 헤아려 매길 수 없다.

잠든 도시 위로 별빛이 흐른다. 잔잔하다. 고흐가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붓질했던 <별이 빛나는 밤>(1889)에 보이는 혼돈의 소용돌이가 아니다. 기억 속에서 명예군민증을 꺼내 펼친다. 은은한 막걸리 향이 나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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