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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스트라토    
글쓴이 : 장석창    23-06-06 21:34    조회 : 1,574

백마는 달리고 싶다.

고삐가 풀린다. 마구간 문에는 어둠과 밝음이 혼재한다. 이를 넘으면 속박이 해방으로 환치한다. 자유를 향한 열망은 그가 일으키는 흙먼지에 갇히지 않는다. 그 정기는 그대로 상승하여 주행의 역방향으로 갈기를 부양하고 흩날리게 한다. 다른 백마들도 뒤따라 뛰쳐나온다. 영화 <파리넬리(Farinelli: Il Castrato, 1994)>의 한 장면이다.

파리넬리는 카스트라토(Castrato, 거세한 남성 가수)다. 그의 정체는 철저히 이중적이다. 그는 남성의 얼굴에 여성의 음성을 지닌 천사인가, 아니면 신의 섭리에 반한 목소리를 가진 노래꾼일 뿐인가. 마에스트로 헨델의 상상력을 거세시켜 더는 오페라를 쓰지 못하게 만든 초인인가, 아니면 인간의 뒤틀린 욕망에서 파생한 괴인(怪人)일 따름인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 천상의 소리로 뭇 여성을 혼절시키는 왕자인가, 아니면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는 악몽에 시달리는 초라한 영혼에 불과한가.

“인조 고환 삽입술을 받고 싶은데요.”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 진료실에 내원했다. 수년 전부터 만성 전립선염으로 나를 찾아온 환자다. 중학생 시절, 축구를 하다가 사고로 좌측 고환이 파열되어 고환 절제술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 경우 성인이 되어 고환이 완전히 성장한 후, 미용 목적으로 인조 고환을 삽입하기도 한다.

그는 매사에 불만이 많았다. 지금 MZ 세대의 상황을 보면 그다지 나무랄 일도 아니어서 그 불만에 대부분 동조해주었다. 동사무소 9급 공무원인 그는 소위 말하는 명문 사립대 경영학과 출신이다. 친동생의 동문 후배여서 더욱 마음이 갔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잠시 다니다가 퇴사했다고 했다. 동사무소에서 서류 발급 같은 허드렛일이나 하는 고학력 엘리트, 그는 그러한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진료의뢰서를 발부해주었다. 텅 빈 왼쪽 음낭을 채운 인조 고환이 그의 공허함을 다소나마 메워주기를 기원했다.

영화 <파리넬리>를 본다. 처음 관람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영화는 파리넬리의 영광 저편에 자리한 인간적 고뇌에 초점을 맞추지만, 어쨌든 그는 성공한 카스트라토다. 그보다는 대다수 소외된 카스트라토의 삶이 스쳐 지나간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 남성 호르몬 고갈로 인한 근력 저하로 노동력마저 상실한 그들에게 남은 건 환호 대신 조롱이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영화를 돌려 보다가 정지 버튼을 누른다. 카스트라토 소년이 자살하는 장면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 허공을 향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의를 표한다.

이름 모를 소년이여. 당신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얼마나 원통했나요. 죽는 순간까지 당신은 눈을 감지 못했어요. 울부짖던 당신의 절규에 가슴이 저며 옵니다.

“다시는 노래하지 마, 카를로. 너도 당할 거야. 목소리 때문에 죽게 될 거야.”

당신은 카스트라토의 미래를 예감했을 거예요. 길거리 청중들 앞에서 벌어진 카스트라토와 트럼펫 연주자의 대결, “O알 없는 놈”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군중 속으로 던져진 그는 자신의 얄궂은 운명에 얼마나 환멸감을 느꼈을까요. 이어 등장한 파리넬리에게 환호하는 관중들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는 1등만을 위하는가 봅니다.

파리넬리의 거세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얀 양잿물 표면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빨간 핏방울은 초경을 한 소녀가 순백의 이불에 물들인 핏자국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자연적 생성이 아니라 인공적 소멸이었어요. 당신은 카스트라토가 되기를 원했나요? 당신을 정체불명으로 만든 부모형제를 원망하지 않았나요? 이를 부추기는 세태를 저주하지 않았나요? 무대를 떠난 파리넬리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궁정 가수로 말년까지 꽃길을 걸어가지요. 자신을 옥죄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이 그래서 더욱 측은해집니다.

몇 달 후 그 청년이 찾아왔다. 전립선 약을 장기 처방받기 위함이란다. 자동차 정비하는 일로 호주 취업 이민을 떠날 예정인데, 심기일전하기 위해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자신을 포장한 허울을 지우고 싶었다. 주위의 따가운 눈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마구간 안에서는 불가능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기로 했다.

나는 어떠한가. 얼마간 수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기말성적표는 수수밭이었고, ‘장래가 촉망됨’이라는 담임 선생님의 의견을 읽으며 우쭐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였다. 상급학교에 진학할수록, 전문직 사회에 진입해서도, 뛰는 놈 위에는 늘 나는 놈이 있었다. 내가 고지를 향해 전력 질주할 때 그들은 사뿐히 날아올랐다. 그들에 대한 동경은 시기와 질투로 변했고, 기진맥진한 나의 뜀박질은 거기서 멈추었다. 나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때 맛본 상실감이란! 도망치고 싶었다. 외면하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길은 회피였다. 삶의 터전을 부산으로 옮겼다. 젊은 시절 지인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다. 나는 2등의 삶을 살았다.

신조어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특히 작금의 세대를 빗댄 것들을 보면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감탄하다가도 이내 쓴웃음을 짓게 된다. 그런데 시절이 하수상한지 시대상을 반영하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러다 갓난아이는 뭐라고 할는지 모르겠다. ‘십장생,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육이오…’ 이 모두 시대가 낳은 사회적으로 거세당한 남성들의 서글프고도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백마 타고 달리고 싶었으리라. 낙마하기 싫었으리라.

처방전을 기다리는 동안 청년은 말이 없었다. 꾹 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를 부르는 파리넬리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이여. 내 잃어버린 자유를 한탄하네. 이 비탄이 내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하소서. 나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한국산문 202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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