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줄
정민디
6.25 전쟁이 올해로 60주년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천안함 사태 등 국지적 도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같은 민족이 다른 생각으로 나뉘어져 있어 애써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평화는 요원하기만하다. 어느 집이나 들추어내면 전쟁으로 기인한 사연 하나 없는 집이 어디 있으랴 마는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우리 가족은 다시 전쟁의 후유증에 휘말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이지 싶다.
“우리나라 지도는 어떻게 생겼지요?”
선생님이 물으시면
“토끼 같이요.”
하고 우리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토끼 같은 우리나라를 그렸다. 지도를 다 그리고는 토끼의 허리에 빨간 연필로 38선을 칠해 놓으면 선생님은 ‘그래, 네 토끼는 빨간 허리띠를 둘렀구나!’ 하시면서 분단된 우리나라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반공 포스터도 열심히 그렸다. 털이 숭숭 난 빨간 손이 남한을 움켜쥐는 듯 한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그 빨간 손이 우리집안도 부수어 놓았다.
종로구 계동이 본적인 아버지는 서울 집을 뒤로하고 안양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6.25전쟁 3년 전부터 안양에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다 짓기도 전에 전쟁이 터졌다. 증조할아버지는 고향인 안산에서 양반의 끄트머리인 진사였고, 할아버지는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의사로 고향에서 멀지 않은 안양에 개업을 해서 여기저기 꽤 많은 땅을 사 놓았다. 할아버지가 요절을 해서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가장이 됐다. 부산으로 피난 갔다 돌아온 아버지는 바랐던 전원생활을 이루려고 포도 농원을 가꾸고 양계장을 만들어 닭을 키우고 밭농사도 지었다. 전쟁 후 취직이 된 한국 상업은행은 기차로 통근을 했다. 언니랑 나랑은 가끔 반공일 (토요일)이 되면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갔다. 우리는 은행 숙직실에서 기다리다가 아버지 일이 끝나면 점심을 먹고 대한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평화로웠던 시절과 참혹한 기억이 공존 하고 있는 안양 시절의 얘기를 편히 할 수는 없다. 아버지의 대학 동창이 불쑥 안양에 나타났다. 그는 동생인 봉운 아저씨를 우리 집에 데려다 놓았다. 봉운 아저씨는 아버지 대신 집안 허드레 일을 다 맡아서 했다. 포도밭을 가꾸고 닭을 키우며, 텃밭에 거름도 주고 할머니를 도와 꽃밭도 가꾸었다. 주중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도 다녔다. 봉운 아저씨는 목마를 태워주며 옛날 얘기를 끊임없이 해 주었고,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면 버들피리도 만들어 주었다. 까슬까슬한 뺨으로 나의 뺨을 비벼주던 첫사랑 같은 봉운 아저씨의 추억은 나쁜 형님의 기억을 희석 시켰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할머니와 아버지는 친구가 간첩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다. 그는 이미 우리 집안 내력을 알고 동생을 데려다 놓고 들락거리며 아버지를 포섭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할머니의 큰사위가 좌익이었는데 전쟁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막내삼촌을 평양 구경시켜서 보낸다고 대동하고는 둘 다 함흥차사가 됐다. 막내아들을 생이별 한 할머니는 그에게서 북한에 있는 아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전전긍긍 시간을 보냈다. 번잡하지 않아 활동하기 좋았던 시골에다 재산도 좀 있었던 친구 집을 북한에 납치당한 동생의 소식을 미끼삼아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드디어 무장을 한 군인들이 집 전체를 포위하고 아버지와 그를 체포했다. 대문도 없고 남의 집 숟가락 몇 개 까지 다 아는 시골 동네에서 난수표 치는 소리는 생경하고 불길했다. 그 당시는 전후 철저한 반공교육을 행했던 시절이라 안 보던 사람이 동네에 나타나면 수상하다는 것을 초등학생들도 다 알 때였다.
아들의 소식을 알고 싶은 어머니의 애통한 마음에 무슨 이념이 필요했단 말인가. 누가 범죄자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쟁이 낳은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은 사람이 어찌 우리 할머니 한 사람 뿐이겠는가. 하지만 나라에는 법이 있고 법을 어기면 응당 벌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의 죄명은 간첩 은닉죄, 소위 불고지죄(不告知罪)라는 거였다. 간첩신고를 안한 것은 엄청난 죄였다. 아버지는 3년 형을 받았고 간첩은 물론 종신형을 받았다. 잘 살던 서울에서 안양으로 이사한 것도 아버지에게는 어쩌면 불리한 정황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형량을 어떻게든 줄이고자 손을 쓰려고 재산을 닥치는 대로 팔아서 집안은 기울대로 기울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호적에 그어진 빨간 줄 뿐이었다. 무서운 세월 3년이 지나고 포도가 알알이 까맣게 익은 가을에 아버지가 돌아 왔다.
6.25 전쟁은 막내아들과 생이별을 하게 했고 큰아들은 호송 줄에 묶여 감옥에 가게 했고 할머니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게 했다. 할머니는 막내 장가 갈 때 준다고 간직했던 시계와 다이아몬드반지를 끝끝내 가슴에 안고 눈을 감으셨다.
‘빨간 줄’의 아픈 기억이 남아있는 우리가족과 6.25전쟁 60년이 지난 지금도 토끼허리의 빨간 줄을 그려 넣어야 되는 이 나라는 언제가 되어야 그 허리띠를 풀 것인가.
2010년 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