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찾아서
11월이면, 그것도 중순에 들어서면 그동안 잊고 살았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제 한 달이면 해가 바뀌네. 올 한 해 이룬 것은 무엇이고 빠트린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든 지금쯤은 슬슬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 아닌지? 아니 도대체 무슨 계획이라도 세웠더란 말인가? 시간에 나포된 채 표류하는 우리네 삶! 며칠 전 밤늦도록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착잡한 터에 TV 채널을 '뒤척이다' 영화 한 편을 골랐다. <컨택트(Arrival, 2016)>!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이해는 쉽지 않다. 검은색 선돌(立石)을 닮은 거대한 외계 비행물체 ‘쉘’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 상공에 ‘도착(어라이벌)’한다. 여주인공인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과학자 이안(제레미 레너)과 함께 햅타파드 외계인과 ‘접촉(컨택트)’을 시도한다. 그래야만 외계인이 방문한 의도(대립, 갈등, 혹 화해?)를 알 수 있을 테니까. 18시간마다 열리는 비행체 내부로 진입해 거대한 낙지를 닮은 미지의 외계 생명체와 마주한 루이스 일행은 외계인들이 먹물로 쏘아 보여주는 둥근 모양의 상형문자 언어를 어렵사리 해독한다.
“이 이야기는 끝이자 시작인 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란다…. ” 루이스가 어린 딸을 어르며 들려주는 첫 장면 대사는 깊은 함의를 갖는다. 장면이 바뀌면서 딸에게 일어났던 가슴 아픈 과거(미래)의 회상(예감)이 외계 비행체를 탐색하는 표면의 긴박한 서사와 엇갈리며 겹친다. 딸이 사춘기를 지나며 불치병에 걸려 생을 마감한 것이다. 여파로 남편 이안과도 헤어진다. 이야기 흐름이 헷갈리는 것은 미래의 사건이 회상 형식으로 현재의 상황에 끼어드는 중층의 내러티브 때문이다. 루이스는 외계인과의 소통 과정에서 시간을 앞질러(또는 되짚어) 미래를 보는 예지력을 갖게 되는데….
우울하고 침침한 색조로 느릿느릿 전개되는 영화는 결국 ‘시간’에 대해 말한다. ‘시간의 다른 모습’은 이 영화가 천착하는 중심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다. 루이스가 파악한 외계 생물체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시간 개념과 다르다. 양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먹물로 쏘아 보내는 외계인의 사간은 추상 언어처럼 원(圓)을 그리는 모호한 순환구조이다. 우리에게는 미래의 일일 수도 있는 일이 과거의 일일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일는지도 모른다는 관점을 드니 빌뇌브 감독은 특유의 절제된 비주얼과 화법으로 보여준다.
시간에 대해서는 탈도 많고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다. 철학, 문학, 과학 등 각 분야의 셀럽(Celebrity)들은 시간의 개념, 또는 성격을 규정하거나, 시간을 원용(援用)해 시간이 아닌 다른 것을 논한다.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에 신을 끌어들인다. “신은 시간의 밖, 그러니까 영원한 현재에 존재하는 자”라는 것이다. 생(生)철학자 베르그송은 시간의 양태(樣態)인 ‘순수지속(duree pure)'을 강조한다. “순수지속은 시계열 상의 흐름이 아니라 직관에 의한 마음속의 시간 감각”이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유한자(有限者)로서의 인간의 숙명과 존재(Sein)의 불완전성은 시간과의 관계에서 규명된다”고 설파한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인 우리도 시간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일까? 말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시간을 앞질러 죽음을 선취(先取)할 수만 있다면! 한편 작가 보르헤스는 조금은 맥 빠지면서도 섬뜩한 말을 한다. “시간은 우리의 본질이자 존재의 핵심이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환영일 뿐이다.”
누가 시간의 맨 얼굴을 보았다고 하는가? 위 석학들의 시간에 대한 언급은 비슷한 듯 다른 듯 알쏭달쏭하기만 한다. <<코스모스>>의 칼 세이건, <<시간의 역사>>를 쓴 스티븐 호킹 같은 현대 과학자의 관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오죽했으면 이들의 대 선배이자 고전역학의 완성자인 뉴턴이 저 유명한 저작 <<프린키피아(Principia)>> 서문에서 “이 책은 시간, 장소, 공간을 규정하기 위함이 아니다”라고 실토했겠는가.
보통 사람에게는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설명한 ‘시간의 상대성’이 조금은 더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을는지? “서로 다른 상대 속도로 움직이는 관측자들은 같은 사건에 대해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하지만 물리법칙의 내용은 관측자 모두에게 동일하다.” 여전히 만만치 않다. 쉽게 풀이하면 ‘시간은 여여(如如)하나 장소와 상황에 따라 느끼는 자에게 길이가 각기 다르게 여겨진다’쯤 될 터이다. 언뜻 생각해도 적막한 산사의 시간과, 시장 통의 시간, 여의도 증권가의 시간은 다를 것이다. 협곡에 낀 시간과,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 한 가운데의 시간, 눈먼 물고기들이 오가는 바다 밑 시간도 서로 다를 법하다.
일상과 주위에서 이상한 시간의 흐름을 찾아볼까? 종로3가역에 한번 가보자. 그곳은 정말 이상한 곳이다. 끈 떨어지고 줄 떨어진 노인들의 천국이랄까, 아니 지옥이나 감옥,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보호지역(Old-timer Reservation)이다. 그곳에서 마주하는 시간의 외양은 특이하디. 일제 강점기를 떠올리게 하는, 백구두에 베레모, 선글라스를 착용한 올드패션(Old-fashioned) 노인들이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빙빙 돌거나 마이클 잭슨처럼 뒷걸음친다. 그곳의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 있거나, 술래잡기를 하거나 뒤쪽 여백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 여주인공 루이스는 미래의 불행(이혼, 딸의 죽음)을 내다보면서도 딸의 아버지이자 남편인 과학자 이안과 결혼한다. ‘끝’이 어떻게 귀결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작’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택한 시간의 불가역성에대한 순응’이 영화의 궁극적 주제인 듯하다. 이래저래 공연히 영화를 선택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으니까. 주위가 어슷어슷 밝아오는 것이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트는 모양이었다. 시간을 붙잡고 싸우느라 시간을 놓친 것이다.
*2018 <<선수필>> 겨울호
원제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또 다른 이해'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