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길순 (안젤라)
‘십자가의 길’을 오르노라니 어디서 기도소리가 고요히도 들렸다. 앞서 나무계단을 오르는 대여섯 명의 순례자들이었다. 익숙한 듯 자연스레 묵상하는 그들 옆에 얼른 끼었다. 내게 기도문을 보여주며 기도를 주관하라 할 때는 미천한 신앙의 깊이에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남한산성 ‘십자가의 길’을 오른 것은 가을운치 때문이기도 했다. 성지성당에서 미사를 본 후, 단풍이 하도 고와 산을 우러르다가 14처소기도 길로 들어섰다. 갈색계단은 알 수 없는 향기로 몸을 감싸 주었다. 십자가 높이 걸린 그리스도를 우러르며 마침기도를 할 때는 하늘이 더욱 깊어 보였다. 늦가을 산속기도는 참으로 편안하고 오롯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마음이 삼천 근이었다.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 삼년 시달려온 재판 때문이었다. ‘수필을 쓰지 않았더라면 표절을 당하지 않았을 터’ 고희가 넘도록 송사로 허송되는 게 참으로 아깝고도 후회스러웠다 .
마침 D동의 문학의 밤 행사였다. 주최 측이 기어이 부탁하는 수필낭독을 마친 후, 부랴부랴 귀가하던 밤이었다. 내일이 항소 첫 재판 날인 걸 떠올리니 가슴이 누름돌 같았다. 불규칙한 심장음은 어떤 언어로도 다스려지지 않았다. 어둠의 길에서 어머니 손을 놓친 어린아이가 그러할까? 공포와 불안을 다스려줄 한 마디가 절실했다. 무작정 펼쳐든 성경에서 눈에 번쩍 뜨이는 구절이 있었다.
“고생하며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 28-30)
골고다 언덕을 오르다 넘어진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대신 져준 시몬을 만났을 때도 그러하셨을까? 그 무겁던 멍에도 짐도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겨우내 얼었던 얼음장이 봄볕에 녹는 듯 편안히 잠 들 수 있었다.
드디어 항소 첫날이자 마지막 날인 이튿날이었다. 지난 7월 1심 패소 후, 석 달 여 동안 놓았던 묵주기도도 고이 바치고는, 어제 저녁 외워둔 마태오복음 11장 30절을 떠올리니 담대해지는 듯싶었다. 그 동안 무거운 십자가를 시몬처럼 져준 변호인들까지 여럿 동행하니 더욱 위안이 되었다.
세상을 원망했었다. ‘열심히 글을 쓴 게 무슨 죄이기에, 이런 형벌을 당하는가’ 수십 년 익숙했던 미사도 묵주기도도 놓아 버리고는 방랑자처럼 방황했다. 긴장한 내게 재판장은 마지막 말을 주문했다. 사형 15분 전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장에서 내려왔듯, 나 역시 이 절체절명의 순간. 마지막 소견을 마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소설의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단 한 문장도, 원고의 언어가, 들어 있지 않은 문장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거대 출판사가, 한 마디 사과조차 없는 현실이, 너무도 억울합니다... 고맙습니다.”
온 몸이 숨 가삐 떨렸지만 정중히 인사까지 하고 나니, 눈물이 마구 솟구쳤다. 마지막 말을 하게 해준 재판정이 오히려 감사했다. 이젠 원망도 후회도 내려놓을 것 같았다. 신께서 이 억울함을 나보다 더 잘 아시리라 여기니 한 결 편안해지는가 싶었다. 그 동안 빙산의 짐을 묵묵히 져준 변호인들께 감사를 드렸다. 그토록 거대한 내용을 말없이 분석해준 변호인들이 아니었으면 그 긴 세월을 어이 견뎠으랴! 이젠 정까지 든 변호인이 말했다.
“작가님, 파르르 파르르 떠실 때마다, 엄청 마음 졸였어요. 그래도 작가님의 진정이 재판정에 잘 전해졌으라 믿습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 한 마디의 힘이었을 것이다.
<<카톨릭신문>> 2018.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