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을지로’
‘거리의 만찬 - 을지로를 만든 사람들’ TV를 보고 있었다. 여성 진행자가 청계천 골목을 누비며 상인들과 인터뷰하는 장면이었다. 어느 순간 고향 선배가 서류를 들고 나타났다.
“와! 고민 선배다.”
혼잣말하며 선배한테 전화를 걸었다.
“선배, 텔레비전에 나왔네. 오랜만이오.”
“응, 잘 지냈는가? 전에 ‘탱크도 만든다, 청계천 공구상가 사라질 위기’라는 방송을 봤는가? 이미 400여 가구가 철거당했는디, 지금 두 번째 방송이란게.”
“아, 그래요! 내일 점심이나 함께합시다. 가게로 갈게요.”
선배와 몇 마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선배 마음이 얼마나 뒤숭숭할까? 재개발에 밀려 쫓겨날 처지라는 방송을 보고 그날 밤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이 70을 코앞에 두고 있는 선배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자리에 터를 잡았단다.
나도 한때 건축자재를 취급했고, 실내장식 가게를 운영하면서 3번이나 이사를 했다. 건물주가 재건축한다거나 집주인이 바뀌면 집세가 껑충 뛰었다. 이사를 하다 보면 단골손님도 떠나고 낯선 곳에서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청계천 골목은 선반, 밀링, 목공, 로구로, 볼트, 툴링, 유압, 용접 등 분야별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가게가 사라지거나 뿔뿔이 흩어지면 완성품을 만드는데 시간상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다음 날 점심시간에 맞춰서 전철을 탔다. 을지로3가역 주변에는 건물을 짓고, 맞은편 인도에는 ‘세입자 대책 없는 재개발 결사반대!’라는 천막이 쳐있었다. 천막 앞을 지나 방송국에서 한바탕 훑고 지나간 골목에 들어섰다. 방송에서 봤지만, 명도소송 중에 있다는 가게들이 듬성듬성 문이 닫혀서 그런지 선배 가게를 찾을 수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목공소 앞인데 가게 못 찼겠수.”
“빠꾸혀! 내가 나갈게.”
뒤로 돌아서 몇 발짝 걷자마자 선배가 나타났다. 선배 손을 잡고 가게로 향했다.
‘00 정밀’ 붓글씨로 쓴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에 들어서자 쇠 깎는 기계들이 양옆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통로라고 해봤자 한 사람 겨우 걸어갈 정도인데, 선배가 선반에 올려놓은 둥그런 의자를 내주며 앉으라고 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선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즈음 마음이 심란허네. 쫓겨나게 생겼어. 건물주가 내용증명 보내고 난리를 친단게. 어릴 적 ‘기술을 배워야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고’ 아버지가 등 떼밀었는디….”
“좋은 수가 있겠죠. 힘내시유, 선배.”
“건물을 지으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달라는 이야기지. 우리 세대가 떠나고 나면 공고생들이 우리 뒤를 이어야 맥이 살아있제, 안 그런가?”
선배는, 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졸업 후 청계천에서 꿈을 펼쳤으면 좋겠는 주장이었다. 독일은 기술자를 우대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한마디 덧붙였다.
독일에서 귀화한 방송인 이참이란 분이 말하길 ‘독일 학생이 기술인이 되려면 중학교 졸업 후 기술 기업에서 3년간 1주일에 하루는 이론 수업 나머지 4일은 마이스터(장인)로부터 실습 훈련을 받는단다. 마이스터가 되려면 짧게는 6년 길게는 12년 정도 훈련이 필요한데, 교과서 이론보다 장인의 기술을 더 인정한단다.’
선배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이 바닥에서는 못 만드는 게 없단게. 한번은 외국 사람한테 ‘수갑 모형’ 3개를 주문받고 ‘메이드-인 을지로’ 마크까지 찍어서 보내줬는디, 수갑으로 인형을 단번에 낚아채는 광고를 찍는디야, 이문도 짭짤했어.”
“와, 선배는 애국자요잉. 수출까지 했은게!”
맞장구를 친 뒤 식사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선배 뒤를 따라 식당으로 가는데 선배 어깨가 축 늘어지고 걸음걸이가 힘이 없어 보였다. 선배 뒷모습에서 어젯밤 TV에 나왔던 청계천 골목 풍경이 되살아났다.
TV프로가 끝나갈 무렵 진행자와 상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상인은 “친구들이 양복을 입고 직장 다닐 때 부러웠지만 한 우물만 팠시유, 직장을 그만둔 친구들이 요즈음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해유.”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고민 선배도 수갑 모형을 만들어서 외국 광고회사에 납품했다고 자랑이 늘어졌었는데, 장인들은 한결같이 긍지와 자부심이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래된 건물을 헐어버리는 것은 역사를 지우는 일로 장인이 걸어온 발자취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TV 화면에 비치는 ‘메이드-인 을지로’라는 금색 로고가 선명하고 자막이 눈길을 끌었다.
‘만드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부수는 것이 낯선 일이다’
<좋은 수필>201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