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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언    
글쓴이 : 김은희    12-05-14 20:08    조회 : 3,228
귀한 선물을 받았다. 은은한 햇살 닮은 하얀 한지 스탠드다. 한지 위엔 선이 날렵하고 빛깔이 고운 단풍잎들이 가을바람을 만나 몸을 맡긴 듯 유려한 몸짓으로 지나온 삶의 표정들을 말해주고 있다. 꿈을 닮은 연두빛, 어느 집 대들보로 깐깐한 가풍 이어갔을 거송의 솔잎같은 진초록빛, 세상을 다 비출 듯 발갛게 떠오르는 해의 색깔, 더 바랄 것도 더 가질 것도 없는 조용한 낙조를 닮은 색, 물기하나 남기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해 한 세상을 살아낸 강마른 노인 같이 건조한 거름으로 남은 갈색까지 그 빛깔들이 말없이 건네는 얘기는 다정하기도 하다. 여리고 흔들렸을 팔순의 손으로 일일이 잎을 골라 압화를 만들고 한지에 붙인 스탠드를 전해주시며 밤에 책 볼 때 켜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런 선이 곱고 빛깔 고운 단풍을 본 것은 대학 1년 때 찾아갔던 칠장사에서다. 내가 스스로 절을 찾아 간 것은 두 번이었다. 두 번 모두 한 친구 때문이다. 한 번은 북한산에 위치한 승가사였고, 한 번은 경기도의 칠장사였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단짝 중 한 명이었다. 학교 때 성이 ‘신’에서 ‘김’으로 바뀐 아이였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아이가 웃으면서 마치 별명이라도 바뀐 듯 아무렇지도 않게 성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친구들은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던 그 친구집에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더니 “친구냐”며 울먹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띄엄띄엄 들려왔다. 다음 날 그 애가 머리를 깎고 머물고 있다는 승가사를 찾아 친구어머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북한산을 올랐다. 택시 안에서 계속 울먹이시는 어머님은 내게 부탁의 말씀을 하셨고 난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승가사를 걸어 올라가는 길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자신이 오는 것을 싫어한다며 우리를 태웠던 그 택시로 되돌아가셨다. 나는 여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늘했던, 절 올라가는 길을 걸으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계속 생각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떤 친구였나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정작 민머리의 친구를 만났을 때 내가 준비했던 수많은 말들을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고 난 울기만 했다. 오히려 친구가 내 어깨를 감쌌다. 우리를 보고 있던 앳된 비구니가 “나도 저렇게 울어주는 친구 하나만 있었어도 머리 안 깎았을 텐데”하는 말에 “이런 친구 뭐하게요” 하며 나는 마음이 온통 깨어지는 것 같아 더 눈물이 났다. 무슨 날이었는지 분비던 절 내부를 벗어나 한적한 곳을 찾던 길에 만난 승가사 여주지 스님은 나를 보더니 “이 친구도 머리 깎으면 예쁘겠네”하시는데 당황한 나를 친구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얼른 다른 데로 이끌었다. 절밥을 함께 먹었을 때 자기 물건들을 철저히 챙기는 스님들의 모습과 주지스님의 그 말씀에서 난 세상의 또 다른 이면을 본 듯 했고 친구가 선택한 세상의 참 모습은 어디에 있는지 막연하기만 했다. 어설픈 설득 아닌 설득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없다. 산을 내려오는 녹음 울창했던 길이 길게만 느껴졌다.
얼마가 지난 후 그 친구가 새로 머물고 있다는 칠장사를 찾았다. 가을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쭈뼛거리며 행자님께 친구의 법명이었던 소림을 묻자 묵언수행중이라 만나줄지 모르겠다며 친구를 부르러갔다. 친구가 묵언 중이라는 말에 당황해하던 나와는 달리 제법 의젓한 승복을 입은 소림은 조용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메모지와 펜을 들고는 내가 하는 얘기를 듣겠다고 쓴 친구의 눈은 조금은 편안해지고 깊어져 있었다. 그 절의 주지스님은 몇 년째 묵언수행중이라며 원래는 써서 말하는 것도 묵언수행을 깨는 것이라고 꺼리는 눈치였다. 한 달 넘게 수행중이라는 친구에게 나의 갑작스런 방문이 미안해졌다. 그리고 막상 만나니 할 말도 없었다. 말 대신 우린 절 이곳 저곳을 걸었다. 어렵사리 찾아갔던 칠장사는 너무 고즈넉했다. 산길을 걸으며 예쁜 단풍잎을 계속 골라 주워주던 친구에게 나는 감탄사만 연발했다. 단풍잎은 어린 아이의 손처럼 섬세하고 여리한 선에 투명한 붉은 빛이었다. 높은 미륵불밖에 기억에 없던 승가사와는 달리 내 마음이 이미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찾은 것이었나. 그 때 보았던 단풍은 도심 공해 속 두툼하고 불투명하게 붉으죽죽한 단풍잎들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났다. 저녁 차 시간에 대기 위해 급히 버스에 올라탄 나를 보내던 소림의 눈에 결국 물이 고였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종로서적 4층 소설코너였다. 친구들과 시내에서 만나기로 할 때면 기다리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게 우리끼리 정한 곳이었다. 이른 봄의 정취가 도심 곳곳에서 풍겼다. 그 애는 꺼칠꺼칠하게 막자란 머리에 남동생이 선물했다는 캡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우린 걸어서 명동 한복판으로 갔다. 이른 봄옷을 입은 예쁘고 늘씬한 여자애들이 힐긋거리는 눈짓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 둘은 팔짱을 끼고 신나게 명동을 돌아다녔다. 그 애가 돌아온 세상의 한복판 같은 명동이 사실은 나도 그 날이 처음이었기에 신기하고 번잡스러웠다. 우리가 살아가야할 세상의 번잡함과 낯섬이 밀려왔지만 우린 까불대며 허세를 부렸다.
그 후 친구는 전문대에 들어갔고 가사 도우미를 하며 전문대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 세상을 살았다. 우린 가끔 종로서적 4층에서 만났다. 그러다가 러시아 유학 중 한국에 왔을 때 연락한 그 애의 전화가 바뀐 것을 알면서 연락이 끊겼다. 핸드폰도 메일도 별로 상용화되지 않았던 때라 그 후로 우린 각자의 세상을 살고 있다. 종로서적도 없어지고 그 친구가 버려야만 했던 세상, 그리고 다시 찾아온 세상 속에서 흐른 세월만큼이나 그 친구도 변했으리라.
귀한 어른의 손에 이끌려서 침묵 속 작업을 거쳐 내게로 온 단풍잎들을 보니 그 친구가 묵언수행 속에서 내게 건네던 그 칠장사 단풍잎들이 그리워진다. 단풍잎 한지 스탠드를 통해 내 세상과 만난 그 어른처럼 그 친구와 나도 언젠가는 교차로 되어 다시 만나지길 바래본다. 우리 만나도 많은 말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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