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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    
글쓴이 : 김은희    12-05-14 20:09    조회 : 3,487
사과 맛을 제대로 못 느껴 본 지가 몇 년째다. 러시아에서 얻은 것들 중 하나다. 큰 애가 두어 살쯤 되었을 때부터 붉은 빛의 사과를 먹으면 목이 간질거리며 부풀어 오르고 눈을 비비게 되는 알레르기 증세를 나타났으니 벌써 10년은 훌쩍 넘었다.
어렸을 때 사과는 참말 새콤하면서도 아삭했다. 단맛의 과일보다는 신맛이 나는 것들을 좋아했던 나는 배보다는 사과, 복숭아보다는 자두, 딸기보다는 신 포도가 좋았다. 그 중에서도 사과는 사각 씹히는 쾌감과 그 아삭함 속에서 흥건히 베어 나오는 과즙이 어떤 행복감까지도 선사하는 것 같았다. 백설 공주가 계모가 건네는 독 사과를 거절 못했던 것이 당연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게 탐스럽고 예쁜 사과를 어떻게 안 먹어 볼 수가 있겠는가...
사과는 인류와 함께 한 과일이다. 성경에서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의 열매를 이브가 따먹고 아담에게 건넨 것이 사과였다고 한다. 사과로 인해 인류는 신의 세계에서 분리되어 ‘원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태초에 사과는 사람을 신으로부터 떨어져 살게 만들고 신과 인간의 경계를 구분 지어 놓는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중 하나가 헤라의 비밀동산에서 황금 사과를 3개 따오는 것이었다. 황금사과가 열리는 나무는 헤라가 제우스와 결혼할 때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선물했던 것으로 헤라는 헤스페리데스와 머리가 여러 개인 용 라돈을 시켜 그 나무를 지키게 했다. 헤라클레스는 모든 과업을 성공하고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다. 또한 이 사과는 '트로이 전쟁'의 씨앗이 된 '분쟁의 사과'로도 유명하다. 바다의 님프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쓰여진 사과를 던져놓는다. 아프로디테, 아테네, 헤라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라는 심판을 위임받은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얻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선사한다. 파리스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의 사랑은 결국 '트로이 전쟁'의 씨앗이 되어 트로이의 멸망과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를 가져온다.
아들의 머리 위에 얹혀진 사과를 활로 겨냥해야 했던 14세기 스위스의 빌헬름 텔에게 사과는 정치혁명을 이끌게 한 도화선이었고, 17세기 아이작 뉴턴에게 사과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해준 영감이었다. 19세기 말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가 폴 세잔(1839-1906)에게 사과는 현대미술로 가는 교두보였다. 1870년대부터 세잔은 사과를 집중적으로 그렸는데, 그가 하도 사과만 붙들고 있어서 오랜 친구였던 에밀 졸라가 한 바구니의 사과를 그에게 선물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세잔의 그림 속 여러 사과들은 이후 야수파, 입체파 등에 영향을 미쳐 현대미술을 낳게 했다.
현대인의 일상에서 너무나도 친숙한 ‘애플’사의 로고도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다. 컴퓨터 회사가 왠 ‘사과’로고일까하고 항상 궁금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앨런 튜링(1912-1954)을 기념한 것이란다. 영국의 수학자, 암호학자였던 앨런 튜링은 튜링 테스트와 튜링 기계의 고안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계산기 학회에서 컴퓨터 과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매년 수상하는 튜링상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튜링은 어려서부터 총명한 기질을 드러내어 3주 만에 읽기를 배웠으며 계산과 퍼즐에 능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으로 귀국한 후 튜링 기계의 개념을 발표했고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를 이론적으로 해독해서 1945년에는 훈장까지 받았다.
하지만 튜링은 그 당시 영국에서 범죄로 인식되던 동성애자 혐의로 체포된 후 감옥과 화학적 거세 중 선택을 해야 했다.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거세를 선택했던 튜링은 1년간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아 가슴이 발달하게 되자 매우 수치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954년 6월 8일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그 주변에 반쯤 먹은 사과가 놓여 있었다. 부검한 결과는 치사량의 청산가리를 주사한 사과를 먹고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애플사가 튜링을 상징하는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로고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내게도 사과는 특별했다. 밥보다 과일을 좋아했던 나는 언제나 아빠의 귀가 시간을 고대했다. 퇴근시간이면 손에 과일 봉투를 든 아빠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네 자녀를 함께 먹이려니 과일을 사도 크고 굵직한 것보다는 작고 개수가 많은 쪽을 택했던 엄마와 달리 아빠는 사과를 사도 굵직하고 새빨간 홍옥이나 그 때 막 나오기 시작하던 부사를 사오셨기에 아빠의 과일 봉투를 더 기다렸던 것이 내 어린 속내였다.
막내였던 나는 참 오랫동안 아빠의 단단한 사랑을 받았다. 대학 4학년 때 모스크바 어학연수를 떠나 처음으로 가족과 장기간 떨어졌는데, 엄마는 그 때 있었던 일화를 말씀해주시곤 한다. 가구점을 하시던 아빠가 가게 안에 계시던 엄마를 밖을 보라며 급히 부르셨다. 달려 나오신 엄마께 아빠는 가게 앞을 지나가는 한 여대생을 가르키면서 “우리 막내랑 너무 닮았지? 머리 묶은 것하며 청바지 입은 것 하며...” 하시더란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처음으로 멀리 보낸 나를 보고 싶어 하셨을 아빠의 마음이 느껴졌다.
1년 예정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연수중이던 나는 집으로부터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6개월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국제전화가 없던 기숙사로 전해진 “김은희, 서울 집으로 급히 연락바람”이란 러시아어 글씨가 얼마나 낯설고도 불안했던지... 전화를 걸려고 모스크바 시내 중심에 있던 중앙전신국으로 가는 내내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려왔다. 수화기를 통해 띠엄띠엄 들리는 “아빠가 간암 말기”라는 엄마의 목소리는 누군가 저 멀리서 내게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 당뇨와 고혈압을 앓기는 하셨지만 아직 젊으시고 평소 별다른 증세를 느끼지 못하셨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마주한 야윈 아버지가 너무 낯설어 달려가 안아드리지도 못하고 눈물만 났다. 나는 학교를 휴학 중이었기에 아버지 곁에 주로 있었다. 아버지는 병으로 마르고 왜소한 몸을 병원 침대에 의지하여 마치 홑이불만 덮여 있는 것처럼 부피감 없이 누어 계셨다. 항상 굳건한 성 같았던 아빠가 차츰 허물어지고 부서져서 당신이 돌아갈 대지와 같은 높이로 낮아지는 모습이 너무 낯설고 힘들었다. 1년 5개월도, 5년도 아닌, 5개월만의 변화였다. 그런 변화에 우리 가족은 갑작스럽게 적응해야 했고, 수용하지도, 적응하지도 못했는데 아버지는 떠나셨다. 후회, 안타까움, 죄스러움, 온전히 되갚지 못한 사랑...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이젠 먹지도 못하는 사과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던 것처럼 나는 알레르기로 인해 인위적으로 사과와 멀어졌지만, 다른 이들도 나이가 들면 자연히 새콤하고 딱딱한 사과보다는 달고 부드러운 과일을 더 즐기게 되니 사과와 멀어지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란 생각도 든다. 기억 속 아삭함으로 남은 사과 맛처럼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사랑도 가물가물하다.
그렇지만 어렸을 적 나처럼 우리 아이들도 모든 과일 중에서 사과를 제일 좋아한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냉장고에 항상 사과를 채워 놓는다. 아이들이 자라면 자연스레 사과와 멀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럼 또 다음 세대가 사과를 사랑해 줄 것이다. 인류의 긴 시간들과 나의 어린 시절을 사과가 온전히 함께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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