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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향기 (2020.10 한국산문 신작발표)    
글쓴이 : 김주선    20-10-13 14:17    조회 : 11,897

                                                    기억의 향기 

 

                                                                                                                     김주선


 한때, 나는 향수 수집광이었다. 여행 기념으로 한 두 개씩 사 모으다 보니 나중엔 집착이 되었다. 은은하게 분사되는 향기보다는 액체를 담고 있는 우아한 유리병의 로망과 브랜드 수집에 대한 탐욕이 더 컸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금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지인에게 나누어 주거나 오래되어 버렸으니 과거 나의 장식장을 화려하게 채웠던 것은, 젊은 날의 허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향수란 마릴린 먼로가 애용했다는 샤넬NO5’처럼 관능적 향기 거나 마음을 홀리는 향이거나 유혹을 부추기는 것이라 여겼다.  

  미국의 데메테르 향수 제조사의 광고를 보면 기억, 그 모든 것은 향기로 이루어진 삶의 조각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디자인은 다소 촌스럽고 평범하며 향수병은 액체를 담는 용기(容器)일 뿐 우아함은 없지만, 향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언제든 행복한 기억을 소환하고 싶을 때 꺼낼 수 있는 기호품이었다. 사람의 체취를 인위적으로 없애 관능, 요염, 도발 같은 독한 향으로 범벅을 만든다면 호흡곤란이 올 만큼 멀미가 날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 나는 향을 그대로 병에 담아 기획 아이템으로 내놓은 제조사의 전략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꿉꿉한 날씨와 끈적한 기분을 달래 줄 향기가 있다면 사랑스러운 베이비 파우더 향, 오이 비누 향, 바삭한 햇살 내음일 것이다. 데메테르의 수석 조향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삶 속에 자리 잡은 좋은 냄새의 기억은 다 향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향수 이름이 주는 선입견은 없었다. 그의 제품 중에는 재미있는 이름들이 많았다. 작업실에 대한 기억의 냄새를 테마로 출시한 향수 이름만 해도 먼지’, ‘페인트’, ‘본드’, ‘크레용같은 사물에 대한 것이었다. 날씨에 대한 기억의 향기에는 세탁건조기라는 이름도 있었다.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 빨랫감에서 나는 향이란다. ‘소금’, ‘설탕’, ‘초밥’, ‘버터 쿠키같은 음식물에 관한 이름도 있었고, 자연에서 나는 ’, ‘잔디’, ‘풀 잎사귀오래된 가죽 침대’, ‘담요같은 것도 있었다.  

  행복한 기억의 향기는 어떤 것일까. ‘도서관종이책향을 섞으면 도서관에서 나는 책 냄새가 날 것이며 다락방곰팡이향을 섞으면 오래된 다락방에서 나는 곰팡내일 것이다. 곰팡내라면 무조건 나쁠 것이라는 생각이 있지만, 그것은 오해다. 이름처럼 기분을 상하게 하는 냄새가 아니라 추억의 장소로 데려가 그리운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개운한 향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열람하듯 기억을 열람하고 향수를 고르는 일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입가에 웃음을 짓게 하는 향수라는 말이 이해되었다. 엄마 냄새, 아버지 냄새 같은 향수가 있다면 반드시 구매하고 싶을 것이다. 정말 그리운 체취이니 말이다.  

  한여름, 뒤꼍 우물에 엎드려 등목하던 아버지에게 복숭아 단내가 났다. 땀범벅이 된 몸에 비누칠도 안 하고 물만 몇 바가지 끼얹는 정도인데 엄마의 손이 마법을 부리는지 알았다. 땡볕에 검게 그을린 아버지는 복숭아 과수원에 가면 벌레 먹은 것만 골라 따왔다. 달짝지근한 단내가 어찌 나는지 마당에 지게를 내려놓기도 전에 온 집안에 복숭아 향이 퍼졌다. 칼로 잘라보면 영락없이 하얀 애벌레들이 꿈틀꿈틀 기어 나왔다. “우린 왜 맨날 벌레 먹은 것만 먹어요?” 나는 철없이 묻곤 했다. “벌레 먹은 게 제일 맛있으니까 우리만 먹는다.” 아버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과수원집 딸들이 왜 예쁜지 아느냐며 다 벌레 먹은 과일을 먹어서라는 얘기는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였다. 세월은 흐르고 아버지 말대로 나는 예쁘게 나이를 먹었다. 삼대(三代)로 넘어오면서 사과나무를 심었지만, 유난히 벌레가 많았던 복숭아 과수 농사는 별 재미를 못 보셨다. 아련하고 그리운 아버지의 체취는 땀범벅이 된 복숭아 향이었다. 데메테르에서 시판되는 Fuzzy Navel’(복숭아) 향수와 비슷했지만, 내 기억의 아버지 냄새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여름과 달리 아버지의 겨울 작업복은 건초 내음이 많이 났다. 암소가 새끼를 낳아 가축이 늘었고, 가마솥 하나로 쇠죽을 쑤는 일이 버거워 일꾼을 들여 마당에 솥을 하나 더 걸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여물은 구수한 풀 내음이 났다. 가끔 쌀겨 가루나 콩비지 한 대접을 보양식처럼 얹어 주기라도 하면 암소는 뿔질 한번 없이 잘도 잘근거렸다.

 향수매장에서 ‘Fresh Hay’ (신선한 건초)의 뚜껑을 열었을 때 외양간 정서를 알 리 없는 조향사가 건초 내음을 재현한 것이 놀라웠다. 비록 지속력은 짧았지만, 건초 냄새로 기억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쇠죽을 쑤는 아버지 곁에 앉아있었고 아버지의 낡은 작업복에 생긴 보풀들이 내 뺨을 간지럽히는 기억이 떠올랐다.  

  첫사랑의 달콤함처럼 감미로운 꽃향기도 많겠지만, 삶 속에서 만나는 좋은 향기를 기억으로 재현한 향수(香水)는 향수가 아니라 향수(鄕愁)였다. 어떤 이들은 기억을 파는 데메테르 향수를 폄하하며 비웃기도 했다. 귀족처럼 꽃밭에 앉아 가든 뷔페를 즐기는 우아함을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는 향이지만 나처럼 고향의 정서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쇠똥 냄새도 더없이 반가운 향기였을 것이다.

 누군가 향수의 역사에 사족을 달기를 방귀 냄새와 향수의 원료는 같다라고 적었다. 수컷의 분비물을 건조 시킨 사향이나 영묘향처럼 최고급 재료로 쓰이는 용연향은 향유고래의 배설물로 악취가 고약하다. 오랜 시간 바다를 떠돌며 햇빛과 소금에 의해 좋은 향이 난다고 하니, 바다의 황금인 용연향 한 방울이 절대 향수가 되기까지 풍랑을 견딘 인고의 시간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먼 훗날 우리는 어떤 향기로 기억될까. 자식들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작업복에서 나는 땀 내음과 기름 냄새를 맡고 가장의 수고로움을 기억해 줄까. 커피 냄새, 담배 냄새, 생선 냄새 등등, 세상에는 직업을 알 수 있는 냄새도 많을 테고 편안한 위로와 휴식이 되는 달곰한 향도 많을 것이다. 사람의 향기는 멀리 있어도 향기롭고 죽어서 더욱더 향기롭다고 했다. 마음을 홀리는 관능적 향기는 아닐지라도 하물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데 그 향기는 그윽하고 기품있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나를 기억할 때 제일 먼저 연상되는 향은 엄마의 살 내음처럼 이름도 없이 그냥 참 좋은 냄새면 좋겠다.


                                                                                       2020. 10월호 한국산문 신작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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