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부산의 언니와 함께 살고 계신다. 엄마는 나를 잊었지만 나는 엄마를 만나 뵙기 위해 부산을 자주 간다. 언니와 만나면 엄마 옆에서 어릴 적 이야기들을 하며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언니와 나는 엄마 배 속에서 차례로 태어났지만 많이 다르다. 언니는 동네 친구들이 많아서 놀기를 좋아했으며 농사일도 잘 거들어주는 딸이었고 나는 철이 들어가며 어찌된 일인지 주위에 까까머리 남자애들만 바글거리며 여자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애들과 씨름과 축구를 하며 놀다보니 체력이 달려 언제부터인가 나 혼자 종이쪼가리들을 손에 들고 읽기와 쓰기를 하며 성장해 나갔다.
초등학교 시절 가을 추수가 끝나면 마을에서 벼와 땅콩을 수매하는데 그런 날은 사람들이 나를 찾기 바빴다. 나는 마을 어른들과 아버지 앞에서 주판알을 딸그락 딸그락 튕기며 계산을 하는 일명, 우리 마을의 경리였다. 한 해 동안 자식처럼 키우면서 곡식이 바람에 쓰러지면 농부는 기운이 빠졌고 날씨가 변덕을 부리면 흉년이 올까 봐 본인들의 마음도 엎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이런 일들을 떠올리며 충분히 보상받고 싶다는 눈빛을 내게 보낼 땐 나의 책임감이 엄청 컸다. 그렇게 척척 계산을 하고 나면 아버지의 어깨가 슬쩍 올라가며 나를 자랑스러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초등학생 때 마을 앞의 나지막한 자드락길을 걸어 학교에 가던 중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었다. 이슬 마신 나뭇잎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지르르하게 빛나고 있던 소나무 아래로 따라오라고 하며 언니는 앞장서 갔다. 삼베로 만든 런닝셔츠가 옆구리를 긁어서 바꿔 입자며 갑자기 윗옷을 벗었다.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 볼까 봐 내 가슴은 콩닥거렸다. 런닝을 바꿔 입고 언니 뒤를 따라 걸어갔지만 그날은 어떻게 학교까지 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온 종일 들에 나가서 일하느라 피곤하신데도 엄마는 며칠 밤잠을 줄여서 삼베로 속옷을 만들어 입혀주었던 것이다. 어릴 때의 언니는 뭐가 맘에 들지 않으면 성질 급해 뒤집어지는 미꾸라지처럼 팔딱팔딱 뛰는 성격이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옷은 언니한테 입히고 낡은 것은 언제나 내 차지였는데 이럴 때는 새 옷이 좋은 것만은 아니란 걸 나중에 알았다.
어쩌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 미안했다.” 라며 사과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언니가 미운 적이 별로 없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니까.
우리가 성장하여 각자 결혼을 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저녁식사 후 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려서 받아보니 진주에 사는 여동생이었다. “언니야 부산의 둘째 언니가 배탈이 나서 먹지도 못하고 구토와 설사를 계속해서 얼굴이 형편없더라.” 라고 전했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도 했지만 근무를 빼기가 쉽지 않은 나는 “빨리 병원에 모시고 가서 치료를 받아야지 나한테 전화하고 있으면 어떡하나?” 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후에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있지 않다고 해서 “형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빨리 평택으로 언니를 모시고 와요”라고 해 일요일 새벽에 형부가 언니와 함께 도착했다. 언니의 통통했던 얼굴이 못 알아볼 정도였다. 약 한 달간 고생을 했으니 숨이 붙어 있는 것도 기적이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내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무조건 살려야지 하는 마음에 내가 근무하고 있던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일반외과 전문의가 검사를 해보더니 맹장염이 파열된 지 오래되어 심한 장폐색이 되었다며 응급수술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수술 서약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 펜을 잡았는데 손이 멋대로 흔들려 글자가 바로 써지지 않았다.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내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애써 봐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술은 예상시간보다 길어져 온갖 상상을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수술을 끝낸 주치의가 말하기를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심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설명해 주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는 형부를 보고 있으니 원망하는 마음이 치밀고 올라왔지만 참아야 했다. 수술을 마치고 내가 담당하는 병동의 간호사실 맞은편의 특실에 2주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했다. 언니는 난생 처음으로 특별대우를 받게 되니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밤이 되면 당기는 배를 붙잡고 흐느끼며 소원을 빌었다. “건강만 주신다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다 하며 살겠습니다.”라며 병실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기도를 하였다.
그때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언니는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 중, 고등학생 네 명의 자녀들 학비가 필요한 때여서 자신의 치료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힘든 고통을 참다 보니 큰 병이 되었지만 다행히 치료가 잘되어 부산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축 늘어진 언니를 태우고 평택으로 오면서 형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많은 것을 휩쓸어 없애버리는 태풍의 괴력보다 더 무섭고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는 가정을 지켜낼 엄두가 있기는 했을까! 그러나 가뿐하게 치료받고 부산으로 달려 갈 때의 심정은 세상을 다 얻어 훈풍에 날려 가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재 언니는 딴 사람이 되어 있다. 병실에서 했던 기도가 헛되지는 않은 것 같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며 도 닦은 성인처럼 보인다. 본인이 살고 있는 아파트 뒷산으로 운동을 갈 때면 길에 떨어진 페트병, 바람에 굴러다니는 휴지조각, 가벼워서 떠돌아다니는 스티로폼 등을 주워서 내려온다. 미리 큰 비닐 하나를 접어서 주머니에 챙겼다가 그것들을 가득 담아 와서 쓰레기 분리수거함에 넣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언니를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 환경운동가 혹은 환경미화원인지를 묻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했다. 간혹 외출 후 집에 오는 길에 열무나 배추를 댓 단 사들고 와서는 식은 죽 먹듯이 뚝딱하며 김치를 담근다. 그걸 끝낼 때까지 심부름을 하는 형부가 힘에 부쳐서 못하겠다고 잔소리를 해도 언니는 변하지 않는다. 아침이 되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보따리처럼 봉지에 담아 들고 집을 나선다. 좀 지나면 나갔던 언니가 손을 탁탁 털면서 들어온다. 본인 집의 냉장고에 김치가 가득 있으면서도 남을 위해 담그는 것을 보며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며 난 쳐다만 보게 된다.
평소 언니가 말하기를 “멀리 있는 교회나 절에 찾아 가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금과 기부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걸 직접 만들어서 이웃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게 제일 쉬운 일이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남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진정으로 행복해한다. 언니를 보면<고통도 자라니 꽃 되더라.> 라는 글이 마음에 와서 박힌다. 젊은 날 큰 시련을 이겨낸 지금 언니의 살아가는 방향이 어릴 때와 완전히 다르다. 나눠 주고 손해 보는 것처럼 살지만 현재 언니의 살림살이는 가난이라는 글자와 서서히 작별하고 사람들로부터 부자라는 소리도 듣는다. 지금까지 함께하며 울고 웃었던 언니와 나는 절 친이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