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의 희망
최 주 철
밝음이 어둠을 물리면 해의 기운으로 눈을 뜬다. 천년 전 늑대의 긴 울음은 빌딩사리를 가른다. 설음과 질곡의 역사를 허리에 휘 감고 사는 우리, 우리는 토끼처럼 귀를 열고 밝음을 싹싹 쓸어 담는다. 자연의 깊이, 하루, 하루씩 다가오면 내일을 준비하며 희망을 꿈꾼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무형의 것을 만지며, 불가능한 일을 성취한다. 그리고 희망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희망찬 월요일 아침은 주간 계획을 실천하는 첫날이다. 사무실 화초에 물을 주는 일로 시작하는데 식물도 잔득 기대를 하면서 기다린다. 창가, 책상과 테이블 그리고 서랍장 근처, 창가에 서서 커피 잔을 들고 희망을 싣고 달리는 자동차를 보면서 옆에 있는 고무나무에게 말을 건 냈다. ‘사소한 것들을 소중히 해야 해, 그것이 삶을 이루는 버팀목이니까, 그리고 뭔가 하고 싶다면, 일단 너만 생각해,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은 없어‘라고 했다. 고무나무는 그냥 나를 처다 볼 뿐이었다.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다들 저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라고 다시 물었다. 그래도 말은 없었다. 다만 형광들 불빛 보다 밝고 따뜻한 햇살을 찾아 자꾸 창가 쪽으로 얼굴을 돌리기만 했다. 나는 그의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게 했다. 토라진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의 희망은 햇살을 보는 것이 지만 나는 나의 만족을 위해 무시 했다. 그와의 인연이 벌써 1년하고 4개월이다. 내가 『믹스 커피』란 제목으로 강원 경제 신문 시 부분 대상을 받자 지인이 선물로 주었다. 고무나무는 잎도, 눈도 크다. 물을 무척 좋아 헤서 잘 먹고 잘 자란다. 너무 키가 잘 자라는 탓에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팔을 자르고 목을 비틀고, 몸을 끈으로 꽁꽁 동여 매야 한다. 그때 마다 가지는 하얀 혈흔으로 범벅이 되고, 잎은 가지와 이별을 한다.
어느 날 그는 그 모습이었다. 누군가 학대한 증거가 명백하다고 생각 했다. 좀 더 자세히 진단을 하기 시작했다. 고무나무 가지의 머리 뒤 오른쪽 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있다. 그리고 목이 비틀어져 있다. 그것은 그와 함께 하고 있는 관리자를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그에게 겨울 새벽 아침처럼 차갑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바람에 눈이 날리는 것처럼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쾌적한 사무실 환경 조성을 위해 "청소 중에 나무의 머리가 부딪쳤을 뿐"이라고 주장 했다. 사무실은 정적이 흘렀다. 모든 집기들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한사코 꺽은 적이 없다면서 무죄를 주장 했다. 하지만 그것을 내려 다 보던 천장 불빛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재판장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청소하다가 비틀어져 머리뼈가 여러 조각이 날 수 없다"고 불 밝히듯이 말했다. 고무나무를 기대고 서 있던 책상이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몸을 감정한 전문가의 의견을 근거로 삼았다. 의견서 서명에는 식물 전문 교수의 이름까지 대면서 말했다. 교수는 흉기가 "단단한 막대와 같은 물건"으로 봤다. 그러면서 "빠르고 강하게 여러 차례 끊어 쳤다"고 분석 했다. 나는 여러 정황을 미루어 이 의견대로 "둔기로 머리를 여러 차례 때렸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좀 더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세심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나무에게 희망을 주기로 했다. 요즘, 각종 언론 매체는 희망을 찾기란 하늘에 내 별을 찾는 것처럼 힘들다.
사회는 코로나 19로 힘들어 하고, 각종 정책의 혼선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그중에서 신문이나 방송은 정인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고자는 2018년 7월 3일 정인이 입양 신청을 했다. 관련 법 절차에 따라 정상적으로 입양을 했다. 그러나 입양되었던 정인이는 2020년 10월 13일, 생후 16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의 짧은 생과 살해 과정이 보도 되었다. 요즘은 반려 견을 자식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기르는 사람이 많다. 그 아이는 개만도 못한 삶을 살았지 않았나 생각 했다. 필자는 요즘 반려 견을 보는 시각을 시로 표현한 적이 있다.
“개가 서로 다른 개가(凱歌)를 부르고 / 개가 개가(改嫁)를 하고 / 개가 개새끼를 낳고 // 개가 개새끼/ 개가 똥강아지/ 개가 내 새끼 / 개가 워리워리 부르고....중략....// 개가 기사 쓰고 / 개가 재판하고/ 개가 우리를 감옥에 넣고....중략..... // 개가 집 지키고 / 개가 사람을 사랑하고 / 개가 젖가슴 만지고 / 개가 산책하고 / 개가 백화점 물건 고르고 / 개가 음식 주문하고/ 개가 커피 먹고 / 개가 옆을 보면서 운전하고 / 개가 욕실에서 목욕하고 / 개가 침대에 누워 / 개가 사람을 기다리고 / 개가 별 세며 잠이 들면 // 개가 꿈꾸며 / 개가 소리 없이 짖는다, 짖는다 // 개가, 개가?(부분)”라는 필자의 시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정인이는 망망대해 바다 한가운데서, 홀로 폭풍을 만나 싸웠다. 개 보다 못 했던 순간의 삶을. 붉은 눈물 뿌리며 쓰러지는 불새처럼 마감했다. 쪽배도, 해초도, 고래도..., 사회복지사도, 없었다. 그래도 천사의 영혼은 꿈과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싹 틀 무렵인 이른 봄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가정은 근본이었다. 가정이 마을 되고, 마을이 모여서 국가가 된다고 했다. 가족은 새싹 같은 거였다. 먼 미래의 꿈도, 되돌아오는 꿈도 꿨다. 정인이는 그런 울타리가 없었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정인이 사건’을 뉴스로 보고 누군가 그랬다. “사람들 참 대단해. 남의 일에 저렇게 화내고 슬퍼하다니….” 하지만 2016년 대구와 포천에서 벌어진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을 떠올려보면 씁쓸하다. 그때도 6세 미만의 여아가 학대에 시달리다 숨졌다. 사회적 공분이 일어났다. 포천 여아는 굶거나 맞는 끔찍한 가혹 행위에 시달렸다. 전과 10범이었던 양부는 시신까지 불태웠다. 불과 5년 전 일이다.
인터넷 신문 기사에 의하면 “정인이는 2019년 입양된 704명 중 하나였고, 해외 입양아가 317명, 한국인 양부모를 만난 아이는 정인이를 포함해 387명이었다.“고 한다. 정인이는 입양될 때만 하더라도 사무실 고무나무처럼 운 좋은 아이였다. 보건복지부는 해마다 5월 11일에 입양의 날 기념식을 갖는다. 유명 인사를 홍보대사로 초청해 행사도 치르고 입양 모범 사례를 발굴해 상을 주면서 입양을 독려한다. 그 정성으로 이런저런 입양 제도 맹점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개선해주길 희망한다. 정인이를 생각하면서 고무나무의 희망을 살펴주었다. 창가 쪽으로 책상을 붙였다. 이별도 모르던 해 맑은 얼굴, 아픔과 슬픔도 없는 세상에서 그도 잠깐 쉼표를 찍고 숨을 고르며 새롭게 시작하기를 바라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