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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향은 중부전선 DMZ    
글쓴이 : 황선금    24-07-15 19:52    조회 : 2,876
   내 고향은 중부전선 DMZ.hwp (93.5K) [0] DATE : 2024-07-15 19:52:54

내 고향은 중부전선 DMZ

 

황선금

어디 가십니까?” 푸른 군복의 청년이 검문소 안에서 오른손을 들어 이마에 붙이고 경례하며 물었다. 출입을 막는 차단봉 앞에 서 있는 철모를 쓴 군인은 긴 총을 어깨에 메고 두 손으로 총부리를 잡은 채 내 차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연리 친구 만나러 가요.” 초소 군인을 올려다보면서 지갑을 열어 운전면허증을 더듬는데 아뿔사없었다.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신분증 사진을 내밀었지만, 군인은 위조일 수 있다며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서울에서 철원까지 두 시간 넘게 차를 몰고 왔는데 되돌아갈 수 없지 않느냐며 사정했다. 보초병은 민통선에 사는 친구와 직접 통화를 하며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그럼에도 거주민이 초소까지 나와서 인우 보증서를 작성해야 통과할 수 있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병이 무슨 권한이 있겠는가. 할 수 없이 친구가 트럭을 몰고 와서 인우 보증서를 작성해주었고, 나 역시 인적 사항을 모두 기록하여 디밀었다. 그제야 민통선 출입증을 건네받을 수 있었고 신작로를 가로막았던 차단봉이 올라갔다. 

1960년대는 그곳, 민통선 안 마을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정연리를 농장이라고 불렀다. 농장은 남방한계선의 최전방 군사지역으로서 민간인들은 거주할 수 없었고, 봄부터 가을걷이가 끝나는 농사철에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어린 나는 농사일을 하러 가는 어머니를 따라서 농장을 따라다녔다. 젖먹이 동생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통수단이 없어서 매일 삼십여 리 길을 걸어서 오고갔다.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점심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아버지는 지게에 호미, , 등 농기구를 지고 다녔다. 대체로 사람들이 십여 명 넘게 무리 지어 다녔는데, 열두 살쯤 되던 나는 어른들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느라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민통선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군부대에서 발행한 패스와 패쪽이 있어야 했으며 초소 세 곳을 거쳐야 농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슴새벽, 동네 어귀에 있는 초소에 패스를 제출하면 보초병이 교환해 주는 패쪽을 가슴에 달았다. 십여 리 간격으로 있던 초소병들은 가슴에 단 패쪽을 확인하고 통과 여부를 판단했다. 뉘엿뉘엿 땅거미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올 때는 초소에 패쪽을 돌려주고 패스를 교부받아야 했다. 출입 시간이 지나도 패스가 초소에 걸려 있으면 월북이나 사고가 난 것으로 간주하고 군부대가 비상이 걸린다고 했다.

남북관계가 긴장되면 출입하는 농부들은 모두 하얀 상의를 걸쳐야 했고, 어떤 해는 빨간 모자를, 어떤 해는 노란 모자를 써야 했다. 이는 군인들이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그 지역 사람들인지 확인하기 위한 감시 방법이었다.

1972‘7·4 남북 공동 성명이후 민통선에 농토가 있는 사람들은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대북선전용 마을 조성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외부에 사는 사람이 일가친척 집에 방문할 때는 호적등본을 떼어 가서 관계를 증명해야 했다. 서류를 다 갖추었더라도 부대 대대장의 결재를 받지 못해 초소에서 여러 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흔했다. 현재는 그때보다 훨씬 편리해졌다. 2000,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6·15 남북 공동 선언이후에는 신분증만 들고가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지역 주민의 방문 동의가 있어야만 들어갈 수가 있다.

친구의 집은 남방한계선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바로 옆에는 한국전쟁 때까지 금강산을 오갔다는 전기 기차가 다녔던 철다리가 있다. 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한국전쟁 전에 금강산과 원산을 방문하기 위해 외할머니를 따라 두어 번 정도 기차를 타고 그 철다리를 건넜다고 했다. 철다리 끝에는 <지뢰>라고 쓴 세모 모양의 빨간색 표지판이 발 길을 멈추게 한다. 가시덤불까지 엉켜서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없음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지뢰밭은 철원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다. 

1960년대 나무가 유일한 연료였던 시절에는 지뢰밭에서도 나무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친구 오빠는 나무를 하다가 지뢰가 터져 양다리를 잃고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1969년 봄, 내 남동생도 강가에서 놀다가 폭탄이 터져서 열세 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을 잃은 어머니는 넋이 나간 듯했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상처가 깊게 패었다. 그해 겨울, 자식을 불의에 잃은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철원에는 지뢰밭뿐만 아니라 논밭, , 강 어디에나 폭탄이 숨어있다. 2020년 여름, 장마로 한탄강이 범람하여 수해가 발생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지역주민이었던 오촌 당숙이 물이 빠진 마을에서 지뢰를 발견하여 뉴스에 나왔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까지 제거되지 않은 폭탄들이 주민들을 위협하는 땅이다.

2024, 올해 한국전쟁 휴전 이후 71년째를 맞이했다. 지뢰와 철조망으로 막힌 국토와 민족의 분단은 군부독재 정권에게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와 사회적인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남방한계선에서 바라보는 비무장지대는 고요한 적막으로 가득하다. 마치 서로를 겨누는 총부리와 다툼도 우거진 숲으로 감싸인 듯하다. 가끔은 철조망을 훨훨 날아서 넘나드는 새소리가 정적을 깨울뿐이다. 겹겹으로 쌓인 분단의 장벽을 자유롭게 오가는 새들처럼, 인간들도 언제쯤 그 벽을 넘어서 평화롭게 오고 갈 수 있을까.

봄의 전령은 DMZ를 안은 숲에서도 연둣빛으로 물든다. 건너편 북녘의 산등성이까지 퍼져가는 봄빛이 어슴푸레하다. 국립수목원이 발표한 DMZ의 식물 155마일(2016)에 따르면, 이 지역은 희귀식물과 특산식물 등 다양한 고유식물이 서식하여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며 보전 가치가 높다고 한다. 동식물들이 서로를 보살피며 공존하는 생태숲이 자란다는 것은 인간의 이기로 만들어진 분단의 비극의 땅에서도 생명의 씨앗이 싹트고 평화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꽃을 피우는 땅으로서, 이곳이 미래의 유산이 되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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