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글을 쓰다
나경호
이번엔 유럽이다. 여행 가방을 싸며 콘센트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유럽은 나라마다 사용전압과 콘센트 형태가 달라 겸용 콘센트를 써야 한다. 이 물건 하나가 미지의 대륙과 나를 연결해 주는 통로인 셈이다. 두 번째로 챙긴 건 몇 권의 책과 수첩이었다. 무료함을 달래고 글쓰기 취미를 위한 필수품들이다.
독일행 ‘루프트한자’(Lufthansa) 비행기에 탑승하며 루프트한자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친근감에 미소를 짓는다. ‘항공 연합’ 정도로 해석되는 독일말인데, ‘한자’라는 말이 한국어와 비슷해 보여서다. 내 자리는 이코노미석 맨 앞자리 복도 쪽이다. 창 쪽에는 여성 승객이 앉았고 가운데는 빈자리라 좌석 운이 좋았다. 기내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내 몸을 감싸자, 담요를 꺼내어 가슴과 배를 감쌌다.
“어디까지 가세요?” 창가에 앉은 손님에게 물었다. 그녀는 삼십 대 중반으로 뮌헨에서 5 년째 거주 중이라고 했다. 한국에 출장차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며, 결혼한 지 1 년이 되었다고도 했다. 독일 변리사로서, 독일과 한국 간의 특허 일을 추진하러 여행 중이었다. 한국에서 법대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변리사로 일하고 있다.
이야기는 독일의 생활과 복지로 옮겨갔다. 독일은 사회주의를 표방하여 모든 사람이 평균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사회시스템을 설계했다. 소득이 적은 사람은 세금을 적게 내고,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내는 구조는 한국과 다르지 않다, 다만, 대학 등록금과 의료보험이 거의 무료라는 점이 다르다.
그녀는 월급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지만, 한국 친구들은 그 절반을 낸다고 불평했다. 또한, 교포 2세인 신랑은 유명 대기업에 다니는데, 한국인처럼 가부장적인 성향이 있어 가사일을 돕지 않는다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한국 생활이 좋아 가능하면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도 남겼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이지만, 1 차와 2 차 세계대전의 주역이었으며 홀로코스트로 600 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전후 빠르게 회복하여 세계적인 강국으로 부상하였으며 이를 두고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무엇이 독일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6.25 한국전쟁 이후 70 년 만에 대한민국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 발전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린다. 모든 국민이 악착같이 일을 해서 이룬 성과다. 그들도 그렇게 악착같이 일해서 이룬 결과일까? 그들과 우리는 무엇이 다를지 궁금해진다. 이것이 바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행기는 육중한 몸을 곧추세우고 하늘을 가르며 나아간다. 불규칙하게 밀려오는 진동과 소음은 피할 수 없는 여운이다. 마치 우주를 나는 비행선에 갇힌 듯한 이 기묘한 느낌은, 누군가에게는 공포로 다가올 수 있다. 거기에 무료함까지 더해지면 견디기 힘든 고역이 된다. 이를 잊기 위한 가장 좋은 도피처는 잠이다. 모두가 잠을 청하려 애쓴다.
네 시간이 넘도록 글을 쓰고 있었다. 지루함이 온몸을 휘감은 지 오래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지만, 비행기 밖은 여전히 대낮같이 밝다. 마치 북극을 지나는 기분이다. 환경 생물학책을 꺼내 들고 세포 구조에 대한 부분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소 흥미가 떨어지지만, 접을 수 없어 꾹 참고 읽었다. 2 시간을 견뎌낸 후 밀려오는 뿌듯함을 느꼈다.
다시, 수첩을 펼쳐 글을 이어 나갔다. 글을 쓴다는 건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는 일이다. 신이 가장 즐거워했다는 “창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창작”은 그 자체로 사람에게는 충분한 즐거움이 된다. 언젠가 삭막한 삶을 살아왔다는 각성이 있었다. 이후로는 사내 메일을 쓸 때마다 한두 줄의 시를 서두에 적는 방식을 시도하곤 했다. 이렇게 글에 대한 즐거움이 시작되었다.
손끝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행복으로 충만해진다.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더 편한 이유는 말에 대한 보상 심리가 글을 쓰는 동안 작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9 시간 째 졸지 않고 앉아 있었다.
식후 디저트로 주문한 포도주를 입에 갖다 대었다. 이내 씁쓸함이 느껴진다. 긴 비행시간을 견디기에 내 몸은 무리였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 해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대화, 독서, 글쓰기는 비행기에서 무료함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시도였지만,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버틴 경험은 자신과 싸워서 얻은 값진 승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