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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 손님    
글쓴이 : 강선명    25-03-31 08:59    조회 : 1,192
   막걸리손님 최종 한군산문.hwpx (45.9K) [0] DATE : 2025-03-31 09:03:34

막걸리 손님

강선명

 

아침의 마트는 조용하다. 거리는 아직 고요하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뜸하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느릿느릿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막걸리 손님들은 대개 같은 시간에, 같은 표정으로 나타난다누군가는 대충 집어 가고, 누군가는 유통기한을 꼼꼼히 살핀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날씨가 쌀랑하네같은 말을 허공에 흘리고는, 주머니 속 구겨진 검정 봉투를 꺼내어 막걸리를 직접 담는다. 어떤 이는 오늘 막 출고된 것만 고집하고, 또 어떤 이는 일부러 하루 묵은 걸 찾는다. 원하는 브랜드가 없으면 아쉬워하고, 병이 흔들릴까 조심조심 손에 쥔다. 각자의 방식이 분명하다. 때론 그 고집스러움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손끝에 스민 세월의 결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그들에게 막걸리는 단순한 술이 아니다. 오랜 습관이자, 생의 리듬 같은 것. 아침에 한 병, 점심에 한 병, 저녁엔 내가 퇴근한 뒤라 모르겠지만어쩌면 또 한 병 드셨을지도 모르겠다.

이거 어디에 그어야 돼?”

오늘도 아침의 첫 손님은 막걸리 손님이었다. 단말기를 바라보며 묻는 말에, 나는 손짓으로 긁는 자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여전히 낯선 듯, 그는 카드를 손에 잡히는 대로 그었다. 잠시 뒤 또 다른 손님은 결제가 되지 않자 얼굴이 굳더니, 다른 카드를 꺼내 툭 내민다. 말은 없지만, 그 불편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날 선 말투에 마음 한켠이 저릿해졌다비슷한 장면은 하루에도 여러 번 되풀이된다. 현금을 고집하던 그들도 이제는 카드를 꺼낸다. 하지만 기계 앞에선 언제나 잠시 멈춘다. 어제와 같은 방식인데도, 매번 새롭고 낯설다. 기억은 어제 사간 막걸리처럼 흐릿해지고, 오늘은 다시 처음인 듯 시작된다.

 

그들의 말투도 그와 닮았다. 오래 알고 지낸 듯한 친근함과 때론 자식에게 하듯 건네는 말투.

얼마야?”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제는 안다. 그 방식이 그들에겐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가끔은 경계가 모호한 말투도 있다.

줄래요?”

수고해요.“

그 어색함 속에 오래 묵은 정이 스며 있는 듯하다.

 

그들은 그냥 돌아서는 법이 없다. 언제나 작고 익숙한 무언가를 바란다.

에이, 그냥 줘!”

예측할 수 없는 말투와 당당한 표정에,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우게 된다.

 

막걸리를 봉투에 담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은, 몸은 작고 굽었지만 어쩐지 산처럼 넓고 깊게 느껴진다. 말없이 천천히 사라지는 그 발걸음에서, 오래된 시간의 결이 묻어난다나는 문득 멈춰 선다.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조용히 밀려온다. 기술은 끊임없이 앞서가고, 삶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진다. 나 역시 언젠가 지금보다 더 느려지고, 익숙하던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 오겠지. 그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과 마주하게 될까. 예전 방식만을 고집하며 멈춰 있을까. 아니면, 비록 서툴더라도 여전히 세상과 이야기하려 애쓰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 그러고 보니 이곳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하루를 지탱해주는 의식 같은 공간, 또 누군가에겐 점점 사라져가는 익숙한 세상의 마지막 조각. 막걸리 손님은 막걸리를 사러 오는 것이 아니라,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을 확인하러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마트의 자동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천천히 들어선다. 나는 그들 속에서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고, 그 너머로 다가올 나의 모습을 살짝 그려본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그들을 맞는다. 말없이, 천천히, 그러나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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